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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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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

 

 

2022년 4월 23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3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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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4장 13-21절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6장 9-15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용선 마티아 신부 집전

 

 

2022년 4월 23일 (토)
김용선 마티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 두 제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묶어 전합니다. 곧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은 앞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복음을 간결하게 서술합니다. 한편 이 구절의 구성은 단순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함-목격 증인이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전함-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믿지 않음’이 반복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그분을 목격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두 제자가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열한 제자가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되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던 터였습니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함께 모여 있던 열한 제자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이 불신과 깨달음을 반복하며 인간적 나약함을 보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부여된 사명일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지닌 부족함과 모자람에도 이 구원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해야 할 거룩한 사명을 지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기서부터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으로서 다른 것도 그렇지만 부활 사건도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가장 짧고 단순하게 전해 줍니다. 

그래서 이 짧은 복음의 내용은 단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과 그런데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얘기 들었지만 모두 믿지 않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주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신 다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그렇게 믿지 못하고 완고한 사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어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시는지. 이런 사도들에게 막중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겨도 될는지. 

게다가 사도들은 특출난 사람도 아닙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당대 지도자들의 평과 반응을 전합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렇습니다. 유식하고 특출한 사람이 사도가 되고 복음 선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선포자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을 받아들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복음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 선포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개신교 신자는 부르심 받고 천주교 신자는 안 받았을까요? 

그리고 나는 그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습니까? 너는 무식하고 평범하니 방 구들이나 지키고 있으라 하면 좋겠습니까? 너는 무식하니 빠지라고 하면 매우 서운하고 자존심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그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복음 선포자가 될 터인데 그러나 사도들처럼 꼭 세상 끝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여기가 중요하고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멀리까지 생각하면 할 수 없고 엄두도 나지 않지만 가까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나부터 복음화하고 내 가정부터 복음화하면 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제가修身齊家입니다. 

사실 복음은 머리와 능력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 그 자체로 선포되는 것인데 이 말은, 복음은 그 자체로 힘이 있기에 우리가 복음을 지니고 있기만 하면 그 복음이 스스로 선포하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머리와 능력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이런 힘을 믿는 믿음과 사랑으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나는 코란을 통해 하느님을 믿거나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복음에서 가르치는 사랑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자기를 복음화하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 

복음 선포가 의식화된 사람, 

복음 선포의 열정이 있는 사람, 곧 

복음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여기서건 저기서건 그리고 저 멀리 땅끝까지 가서건 선포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베드로가 기뻤던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물을 던진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유튜브를 하라고 하셨던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부활하셔서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참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죽옷, 그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난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엔진까지 수리할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량 수리 가격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차에 이상이 계속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자동차 머플러에서 검은색 매연이 쏟아집니다. 신호대기를 하며 잠깐 정차하는데 시동이 꺼집니다. 핸들을 꽉 잡지 않으면 똑바로 가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갑니다. 계속 정비소에 가서 정비받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차를 타는 것 자체도 겁이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 차를 어떻게 했을까요? 결국 중고차로 팔아버렸습니다. 운전하는데 믿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편한 마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해하면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이 영역이 우선 보이지 않는 실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을까요?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음을 아는 것처럼, 주님 존재를 굳게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 부활 후의 발현을 세 번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것, 그다음으로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나신 것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세 번에 걸쳐 발현하셨다는 기사를 쓰면서 한결같은 어조가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제자들 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제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습니까? 특별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이야기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신비도 끊임없이 전해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세상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께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세상의 것들에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집중해보십시오.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금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때다. 오늘 그것을 못 하면 내일 그것을 할 수 있는가?

- 토마스 켐피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마르 16,12)

 

꽃잎 떨어진 자리에 연두빛 새순이 곱게 돋아난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그 길이 되살아나신 부활의 새로운 길이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이다. 단절되어 있지 않고 막혀있지 않는 마음이다. 익숙한 것을 내려놓는다. 

새로움이 시작된다.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가지 않았던 길을 새롭게 가는 것이다. 만난 적 없는 새로운 변화이다. 부활은 편협하지 않다. 다양함의 뿌리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유롭고 넉넉하다. 우리를 키우는 믿음의 부활이다. 믿음의 풍경 그 중심에 있는 생명의 부활이다. 편협한 자아를 벗어나는 뜨거운 순간이 부활이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복음이 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선포되는 부활의 복음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복음을 필요로한다. 부활과 함께 살아가는 복음의 삶이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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