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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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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

 

 

2022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라며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 오늘 복음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엄청난 양의 고기를 잡게 되었고,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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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4장 1-12절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그 무렵 불구자가 치유받은 뒤,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미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1장 1-14절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자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우석 리노 신부 집전

 

 

2022년 4월 22일 (금)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배우석 리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2일 (금)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밥상 공동체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 21장 1-14절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5,1-11 참조)과 마태오 복음(4,18-22 참조) 그리고 마르코 복음(1,16-20 참조)의 고기잡이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그분께서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였지만, 빈손인 채 날이 밝습니다. 피로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은 물가에 서 계신 부활하신 분을 보지만,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하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겪은 제자들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활동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많은 고기’는 새 계약의 교회 공동체의 선교 활동을,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모든 민족들을 포함하는 인류를 이 공동체 안으로 모아들이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기를 건져 올린 제자들은 뭍에 올라와 스승님과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십니다. 이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성찬례를 떠올리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주님께 초대받았기에, 함께 둘러앉아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을 나누는 거룩하고 복된 ‘밥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힘을 빼고

 

참으로 제가 감탄한 것이 사순절에는 한 분도 <여기밥상>에 손님이 없더니 부활 대축일이 지나자 손님이 생기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이라서 사순절에는 삼간 것이기에 제가 감탄한 거지요. 

어제도 부부 세 쌍이 <여기밥상> 손님으로 오셨는데 미사 중에 늘 하던 대로 말씀 나누기를 하였고, 한 분이 어제 사도행전 한 구절을 가지고 성찰하신 것을 나눠주셨습니다. 

보통 남자들이 무엇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듯 그 형제님도 당신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힘이 들고 결과도 좋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길 때는 일이 순탄하고 결과도 좋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자주 당신 힘으로 하시곤 한다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지혜로서 자주 힘을 빼라고 합니다. 흔히 어깨에 힘을 빼라는 말도 합니다. 운동할 때도 힘을 빼야 힘이 지나치거나 경직되지 않아서 다치지도 않고 경기 결과도 좋음을 우린 많이 경험하지요. 

운동이나 세상사도 이러할 진데 구원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치유한 일로 인해 유다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에 베드로는 자기들이 한 일은 착한 일이라고 하고, 불구자가 치유된 것은 구원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심문받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일로 구원을 이뤄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구원을 이루려면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착한 일이라만 주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는 일이지요. 불구자를 고쳐주는 좋은 일일 뿐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할 때는 어른 말을 잘 들었을 때이고, 주님을 선한 목자가 아니라 착한 목자라고 할 때도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칠 때이듯이 착한 일은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좋은 일 하는 것을 뜻하지요. 

일의 시작부터 일의 끝까지 자기는 빠지고 주님으로 시작하고 주님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일을 시작하고, 주님의 힘으로 그 일을 추진하며, 주님의 섭리대로 일을 끝마치고는 결과를 주님께 영광 돌릴 때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사업의 도구인 베드로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 모두 자기 꿍꿍이가 있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무도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오늘 복음에서 보듯 출세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래아로 돌아가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인생도 실패하고 밤샘 그물질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자기의 목적으로 무엇을 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등장하고 주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그가 153마리나 잡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라고 질문을 받는 우리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가 나서지 않고 주님을 등장시키고,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을 힘입어 무엇을 해야 함을 다시 한번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베드로가 기뻤던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물을 던진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유튜브를 하라고 하셨던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부활하셔서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참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죽옷, 그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

 

술을 좋아하고 담배도 많이 태우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워낙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술도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는데 그 모든 것을 끊어버렸으니 주변에서 다 의아해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졌나 싶었는데, 이 청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 
 
여자 친구가 술과 담배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데,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것을 하겠습니까? 싫다는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술과 담배를 더 사랑했다면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훨씬 커서 불가능해 보였던 금주와 금연이 가능했습니다. 
 
세상 안의 유혹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끊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져서 죄짓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이 너무 힘들 때,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커질수록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는 어민들이 낮보다 밤에 출어합니다. 밤에 고기가 더 잘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침에 신선한 상태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전문 어부 출신이지만 그의 고기잡이는 그리 신통하지 못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이번 역시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힘과 재주만으로는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부모가 귀여운 자녀들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시지요. 그때 비로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요한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신속한 행동파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님을 알아봅니까? 또 주님이라는 확신에 곧바로 실천하는 행동파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두 모습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바로 행동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멀리서도 주님이심을 알 수 있고, 사랑하기에 주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의 성숙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고통을 쉽게 거절하지 마라.

- 게리 토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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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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