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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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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

 

 

2022년 4월 19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자 삼천 명가량이나 되는 이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당신께서는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1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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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2장 36-41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0장 11-18절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졌으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우석 리노 신부 집전

 

 

2022년 4월 19일 (화)
배우석 리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무덤 안쪽 하얀 옷의 두 천사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눈앞에 계신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슬픔의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분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에게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눈물이 환희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이상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건너가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성자께서는 성부를 ‘내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으로 하느님과 맺는 일정한 관계성의 차이를 전제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붙들지도 붙들리지도 말고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어제 마태오 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붙잡고 절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 요한 복음의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신을 붙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어떤 것이 더 역사적인 사실에 맞느냐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왜 당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 영성적 의미에 대해서만 집중하면 될 터인데 하나는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막지 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어서 제자들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주님을 붙잡는다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는 것이 방해받기라도 하기에 붙잡지 말라는 것일까요? 하늘로 오르려는 열기구가 밧줄에 묶여 못 올라가는 것과 같은 걸까요?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 때문에 주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실 것을 못 올라가실 리 없을 겁니다. 이는 집착치 말라는 말씀일 것이고, 인간적으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관을 땅에 묻으려 할 때 아들들은 그저 울기만 할 뿐이지만 딸들은 관을 붙들고 묻지 못하게 울고불고하는데 그런 것처럼 하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육신으로는 이미 저를 떠나셨지만 저는 한동안 어머니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나고 이제 어머니를 놓아드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더 오래전에 제 친구가 서른셋 나이로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허무감 등으로 친구에게 매여 있었는데 1년 반 정도 지난 어느 날 꿈에 친구가 환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렇게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고 꿨어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때는 너무도 꿈이 선명하고 일어나서도 생생하여 일어나자마자 이제 친구는 하느님께로 갔고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하면서 놓아줬습니다. 

사실 이것은 꼭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누구도 하느님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마리아야"라는 부름에 "라뿌니"라고 응답함으로써 순간, 돌아가시기 전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돌아가는 착각을 했는데 그런 마리아를 주님께서는 정신 차리게 하시며 관계를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너와 나-하느님의 관계이고, 너의 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인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내 형제라고 부르며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시지요. 

그러니 마리아가 주님을 붙들고 있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형제들인 제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 만남에 머물지 말고 이제 주님을 떠나 형제들에게 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전해야 하고,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로 우리도 올라가야 함을 전해야 합니다. 아직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잊지 말고 살자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와 동행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인가?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엔 이 순간이 무덤이 아닌 ‘정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원은 단순한 정원이 아닙니다. 바로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은 생존에 대한 문제, 심지어 죽음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 곳입니다. 계속 설명해 왔지만,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동산지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지기는 아담이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한 여인을 “마리아야!”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모님조차 마리아란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아온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처럼 살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새로운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아버지는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서 나온 예수님도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도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소명을 마리아에게 넘겨줍니다. 새로 태어난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처러 누군가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신 분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지 못하실 분처럼 두려워하며 세상 것에 다시 집착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유기성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함을 믿으려면 내가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생명이시기에 내가 죽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부활이 더 명확히 믿어진다고 합니다. 

군종 목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던 도중 발이 부러집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훈련을 받아서 발을 거의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 목사는 수원에서 목사로 있던 아버지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와 통화가 될 수 없었고, 수술 대기실에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 목사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찾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먼저 찾았던 목사로서의 부족한 신앙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자신에 비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자 이젠 주님께 자기 발을 바치고 싶어졌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께 의탁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었고 이젠 제발 자신이 절름발이 목사로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세 번 수술하고 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까지 이기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다음 시련은 목사가 된 이후 찾아왔습니다. 한 장로님이 불쌍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었는데, 신도들 사이에 유 목사가 그 장로에게 돈을 꿔가서 갚지 않아 그렇게 잘해 주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더는 유 목사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 느낀 배신감과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목사로서 일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없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계속 왔습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시절 주님은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고자 논문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 했지만, 마음 안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고민을 너무 한 탓에 열이 끓어올랐고 몸이 아주 아팠습니다. 이불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 석사가 되는 게 뭐라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또다시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께 의탁합니다”라고 몇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없는 평화가 오고 열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유 목사는 석사가 되지 않고도 담임 목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여서 다행히 석사가 없는 거의 유일한 학사 담임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 옆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우리가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믿음은 나의 모든 것, 결국엔 생명까지도 요구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기꺼이 그분께 봉헌할 수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을 잃는 것도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한 번은 다른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로 방금 암 판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이것이 지금 자신처럼 마음 아픈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는데 그들에게 큰 위로의 복음이 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까지도 주님께 바친다는 강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강의도 잘 되고 아내도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해졌습니다. 아내도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집에 오는 길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들에게 선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유기성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국 나를 죽이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음까지 이기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방법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다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가요, 아니면 아직 부활하기 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그 예수님과 동행하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말하지 않아도 맡기기만 하면 다 해 주실 분임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을 걱정도 없고 또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라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나와 만들어집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표현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할 때 그분 손바닥에서 나 때문에 뚫리신 구멍을 확인합시다. 

그 구멍이 있는 것을 본다면 나는 에덴동산에서 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하지만 아직 구멍이 없다면 나는 아직은 완전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 손의 못 자국을 항상 확인하십시오. 죽음을 이기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나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절망의 기초가 되는 것은 결국 우상화밖에 없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모든 절망의 기초가 되는 것은 결국 우상화밖에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절망하는 것은 우상화한 것이 깨졌거나 환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어머니라는 것에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을 우상화했지요. 그래서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자녀와의 커다란 다툼이 생겼을 때 크게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상화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절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등을 우상화하면 절망에 빠질 확률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우상이라는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우상에 기대어 사는 삶이 아닌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 하느님이신 주님이 중요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만 잃지 않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나 늘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처음 소식을 알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었습니다. 누가 주님의 시신을 꺼내 가서 훼손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요. 하긴 직접 부활 예고를 들었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는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부활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됩니다. 그만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울면서 빈 무덤을 지키고 있었으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있었으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을까요? 주님께서도 그 사랑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에게 사명을 내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키워야 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의 따뜻한 말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사명을 받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 알프레드 아들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 15)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신다. "마리아야!" 부르시며 우리를 돌아서게 하신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다. 모두 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바꾸어 놓은 새롭고 새로운 부활의 모습이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되는 빛나는 부활의 모습이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하는 참된 사랑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시금 서로의 사랑임을 부활로 보여주신다. 우리의 울음과 눈물 또한 사랑을 향해있다 더 깊이 사랑하였기에 더더욱 간절한 것이다. 이 슬픔을 걷어내는 부활의 참기쁨이다.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부활은 단정과 규정을 뛰어넘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부활은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 된다. 신앙은 보고 믿는 뜨거운 체험이다. 우리 뒤에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다시 새롭게 보는 봄(春) 연두와 초록의 순수한 부활이다. 

시각과 관점을 바꾸면 이미 와 있는 새로운 부활이다. 새롭게 새롭게 만나는 부활의 기쁜 소식조차 붙들지 않는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사랑의 새로운 소식이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 18)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보는 사랑이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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