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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7일 (일) 부활대축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by 평화다방 202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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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7일
부활 대축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부활 대축일 -

 

 

2022년 4월 17일 (일) 명동성당 12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주님부활대축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달려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2년 4월 17일 (일) 명동성당 12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주님부활대축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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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집전

 

 

2022년 4월 17일 (일)
주님부활대축일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집전

 

 

명동성당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생중계

 

 

2022년 4월 17일 (일) 12시
주님부활대축일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10장 34ㄱ절, 37ㄴ-43절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콜로 3장 1-4절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0장 1-9절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부활의 증인인 베드로 사도가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고쳐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우리도 굳게 믿고 이웃에게 전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하느님, 하느님의 자애로 교회를 인자로이 보호하시어 저희가 파스카 신비로 새로워져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알립니다. 두 제자가 빈 무덤으로 달려가지만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합니다. 뒤따라 온 베드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다른 제자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습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가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대중 앞에서 설교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는데, 그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제 유다인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뻗어 나가는 보편적 구원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의 이름으로 집필된 콜로새서인데, 다음의 내용을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노예살이를 하던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부활

 

제가 늘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 성탄이건 부활이건 2천여 년 전 베틀레헴과 예루살렘의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발생해야 그것이 참으로 내게 의미있는 성탄이고 부활이라는 겁니다.

물론 2천 년 전 베틀레헴의 그 첫 성탄이 없었다면 유다인의 하느님을 대한민국의 내가 믿을 이유가 없어서 믿지 않을 터이니 2천여 년 전에 주님 탄생은 너무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며 부활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루살렘의 그 첫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근본적으로 헛된 것이 되니 역사적인 부활이 무엇보다 의미 있지요.

그런데도 주님의 성탄과 부활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발생해야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의 명약이 2천 년 전에 발명이 됐어도 먹어야 그 약효가 내 안에서 효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약이 발명되지 않아도 문제지만 약을 먹지 않아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뭣 때문일까요? 그것을 저는 어제 새벽에 묵상하다가 깨닫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서 부활하시지 못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주님이 제 안에서 죽으신 적이 없기에 다시 살아나시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이란 말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니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다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 안에서 돌아가신 적이 있어야 다시 사시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 아니 계신 적이 없고 늘 함께 계시는 분이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문제는 제 안에 늘 계시는 그분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어 제 안에 안 계셨다면 저도 어떤 식으로든 주님을 살려냈을 텐데 비록 가죽음 상태로라도 계시기에 그것만 믿고 문제의식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성삼일 제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온 것이고,

그래서 한편 부끄러웠지만 다른 한편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에 제가 체험한 주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은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확실히 죽이고 참생명의 주님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야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죽여야 할까요? 방법이 뭘까요? 이제와서 니체처럼 신은 내게서 죽었다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될까요?

그것은 안 될 일이고, 억지춘향입니다. 내 안에 엄연히 계신 주님을 사형 선고 내린다고 그 주님이 죽지 않음은 물론 그러고는 제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어떡해야 합니까? 어떻게 주님을 죽이고 어떻게 살려내야 합니까?

잘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제 안에서 가죽음 상태로 계신 이유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되겠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에 나도 사는 저이어야 하는데 내가 살아서 주님이 기죽어 계시는 상태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야 죽어 계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그런데 나를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내가 죽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것이 한두 번 아니고 노력 안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먹되 주님께서 죽여주실 때 그 죽음을 거부하지 않음이 하나요. 죽여주실 때 그것을 잘 알아채고 순순히 죽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죽어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죽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관을 스스로 따지 못하여 따주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스스로 죽지 못하기에 안락사를 돕는 다른 이가 필요하듯 죽여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죽여주시고 그때 우리는 죽여주시는 주님의 그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주님이 제 안에서 살아나는 부활 체험은 일생일대의 큰 체험이고 이런 부활을 우리는 큰 부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부활 체험을 하고 그래서 저처럼 주님께서 내 안에 늘 계시지만 가죽음 상태로 계신다면 작은 부활도 있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일상의 부활이요 그때그때의 부활 말입니다. 살다 보면 깜빡깜빡 주님을 까먹어 주님께서 죽어 계시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수녀원에 오면서 부활 선물로 돼지고기와 저희가 키운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잊지 않으려고 며칠 전부터 신경 썼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돼지고기만 가지고 오고 콩나물은 안 가져 왔으며, 한심하게도 수도자가 정작 수도복을 안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광야 체험을 하고 돌아오면서 수도복과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또 와서 보니 콩나물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처럼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도 그보다 하찮은 것에 신경 쓰다가 까먹는 것이인간이고 특히 저인데 하느님도 종종 이렇게 하찮은 것들 때문에 까먹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까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기도하는 대신 걱정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갈망하는 대신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일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렇게 까먹은 주님을 다시 살려내는 일상의 부활이요 작은 부활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번 부활절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기충격을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기를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활, 정말로 기쁘신가요?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40일간의 사순시기를 모두 지내고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정말로 기쁘신가요? 혹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은 우리가 기쁘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기쁘게 부활을 맞이합니까? 
 
매년 맞이하는 것이니 힘들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생일을 기억해보세요. 매년 맞이하는 생일인데 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십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갖게 된 기념일은 또 어떻습니까? 
 
매년 똑같이 맞이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맞이하는 연중행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 또 사랑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기에 그녀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바르려면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을 치워야 하는데,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다른 복음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갑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들고 무덤을 찾았지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요한과 함께 뛰어갑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얼굴에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신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 애덤 스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되살아나셨다. (루카 24,6)

 

되살아나는 부활의 열쇠는 다름아닌 삶의 십자가이다. 삶을 삶으로 풀어가는 십자가이다.​​ 떨리는 십자가는 주님의 참된 사랑이며 어김없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 얼어붙은 겨울의 십자가 여기 저기에서 봄꽃이 향기롭게 가득 피어난다.​​ 연두빛 새순도 돋아난다.​​ 연두빛으로 빛나는 생명의 물결이 바로 부활의 힘찬 물결로 다가온다.​​

십자가와 부활은 늘 함께있다.​​어둠과 빛 또한 함께있다.​​ 십자가를 다시 보게되는 부활의 감격이다.​​ 희미해져가는 십자가의 믿음을 되살려놓는 엄청난 부활의 힘이다.​​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면 반드시 부활이 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지불한 부활이다.​​ 십자가의 뜨거운 발자국이 부활의 빛나는 풍경이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하신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로 ​가르치시고​ 부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하신다.​​ 십자가로​ 소통하시고​ 부활로 참된 ​삶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신다.​​ 

삶이 따뜻하고 ​아름다워지는​ 사람의 길이​ 부활의 길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믿기에​ 십자가에​ 감사드리며 ​가장 중요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랑의 실천이​ 되살아나신​ 부활의​ 참된 핵심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십자가로​ 살아가며 ​십자가로​ 부활의 문을​ 여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되살아나는​ 뜨거운 십자가​ 사랑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외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 부활하신​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십자가로​ 지켜내신​ 사랑의 승리​ 쏟아져 내리는​ 부활의 일상이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되살아나셨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삶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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