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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5일
명동성당
성금요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 성주간 금요일 -
2022년 4월 15일 (금) 명동성당 20시 구요비 욥 주교 집전, 주님 수난 성금요일 평화방송 미사 생중계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주님의 종께서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가셨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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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주님 수난 성금요일 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2022년 4월 15일 (금) 20시
주님 수난 성금요일
구요비 욥 주교 집전
제1독서
이사 52장 13-15절, 53장 1-12절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화답송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모든 원수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웃들을 소스라치게 하나이다. 아는 이들도 저를 무서워하고, 길에서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 가나이다. 저는 죽은 사람처럼 마음에서 잊히고, 깨진 그릇처럼 되었나이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라, 마음을 굳게 가져라.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제2독서
히브 4장 14-16절, 5장 7-9절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요한 18,1-40절, 19장 1-4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5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아니오.”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24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아니오.”
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30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그러자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34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40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바라빠는 강도였다.
19,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 사람이오.”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7
그러자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더냐? 무엇으로 너희를 괴롭게 하였더냐? 대답하여라.”
비탄의 노래 후렴구가 우리의 가슴을 후빕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않도록,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간구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자비로이 저희를 지켜 주시어 이 신비에 참여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 수난 예식의 건조함
주님 수난 예식은 매우 간소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되새겨 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건조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 잠기게 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허전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고요함은 교회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절히 희망하게 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위하여 말씀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묵상합니다.
제1독서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제2독서는 자비로운 대사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한편 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그 자체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매우 풍성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며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 그리고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그리스도를 잡아 바치는 사람이 꼭 ‘나’여야 하는가?
제가 비르짓다의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면서 궁금했던 것 하나는 나의 죄를 대신해 그리스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짓는 중죄를 막기 위해 “예수님의 첫 번째 상처와 그 첫 번째 고통과 첫 번째 피흘리심을 바치나이다”라고 하던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당하신 무서운 고통과 흘리신 그 하나하나의 핏방울을 모두 바치나이다”라는 식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치는 사제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 복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병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겉옷을 네 개로 쪼개어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제의 속옷은 흰 아마포로 되어있었고 정결함을 상징했습니다.
저는 왜 우리가 직접 그리스도를 죽여 바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지 알렉산드로와 마리아 고레티의 예를 들어 다시 들며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알렉산드로는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못하고 감옥에서도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때 마리아 고레티는 알렉산드로에게 나타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주었습니다. 그제야 알렉산드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욕정이 순결한 그녀를 죽게 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마리아 고레티가 알렉산드로에게 준 백합은 오늘 복음에서는 로마 병사가 제비를 뽑아 갖게 된 예수님의 속옷과 같습니다. 속옷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비는 운입니다. 운이 좋은 사람만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이 정결한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그 죗값으로 그가 죽게 만들어야 그 순결한 이의 순결한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죽인 것이라면 알렉산드로는 정결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부정한 것을 없앴다고 오히려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나의 가장 사랑하고 순결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했다고 느낄 때 그 순결함을 내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곧 내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고 다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으로부터 백합을 받는 이들만이 그분의 순결함을 입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내 죄 때문임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이들에게 이 행운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겉옷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지위’입니다. 옷은 지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네 개로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이 지위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은총의 풍부함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한 줄기였던 물이 나중엔 네 줄기로 나누어져 온 땅을 비옥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풍부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말합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에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 뒤 고레티 어머니를 찾아가서 용서를 청하고 자신은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정원지기로 살며 보속하다가 죽습니다. 그때 채우지 못했던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가 가진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그녀를 찌름으로써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찌름으로써 하느님의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찌른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이교도에게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위험한 부위를 지나쳐서 살 수 있었고, 교황은 그 광신도를 찾아가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을 자신이 믿은 종교 때문에 그렇게 다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그 종교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지닌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지위 탓이 아니라고 여기면 교황이 주려는 겉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을 에사우라고 하였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겉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짐 엘리엇(Jim Eliot, 1927-1956)은 미국의 침례교회 선교사입니다.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및 세계 성서번역 선교회(GBT)선교사이며, 에콰도르 원주민을 선교하려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짐 엘리엇은 1927년 10월 8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아버지 프레드(Fred)와 스위스 출신의 어머니 클라라(Clar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짐 엘리엇은 1945년 가을 일리노이 주서부 시카고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 학교인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여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를 위해서 생애를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SIL 교육기간을 거쳐 1952년 봄 에콰도르에 도착한 짐 엘리엇은 와오다니(Waodan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함께 선교활동을 할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 방송과 함께 선물꾸러미를 투하해 접촉을 준비한 짐 엘리엇과 일행 4명(네이트 세인트,피트 플레밍,로저 유드리언,에드 맥컬리)은 1956년 1월 8일 와오다니(Waodani) 부족민들과 직접 접촉하려고 했으나, 백인에 대해 적대적인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사망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발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엇은 아우카족에게 제대로 복음도 전하지 못했고 성경책 한 권도 전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 열매는 매우 컸습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그녀 역시 목숨을 걸고 남편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만나 본 아우카 부족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습니다.
이 종족은 여자들은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아우카 부족이 복음화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살해한 3명이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들을 죽인 이들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죽이고 부모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속옷과 겉옷을 입었습니다. 부모의 피를 통해 우리 동물적 본성이 정결하게 되었고 부모의 인간성을 물려받아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렇듯 나는 지금 누군가를 죽이고 그 누군가의 정결함과 정체성을 입어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진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 살려면 하느님 자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정결함과 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에게 채찍질하고 멱을 따고 십자가에 못 박고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내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제물을 바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셨는지 알아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정결함과 지위를 얻어 영원한 나라에서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돌아가신 이유고 이것이 내가 그분을 죽여 봉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죄의 유혹에 올바르게 살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의 구렁텅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면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악행의 모습들을 보며 진짜로 그렇다는 확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처럼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남들처럼 무감각하게 죄짓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이런 환경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롯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조카로, 땅을 나눌 때 자신의 욕심 차리기에 급급해서 비옥해 보이는 소돔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악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그네로 보이는 천사에게 행한 그의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하지요. 결국 이런 사랑의 행동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가득한 소돔에 있을 때 그가 선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장소나 상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도 위기 체험을 통해 거룩해졌다고 하지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도회에서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었고, 이냐시오 성인들도 교회로부터 거부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순명하셨습니다. 이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셨고, 사랑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적의를 보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이 이제 감히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모든 악이 이 안에 가득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커다란 은총이 있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이 악을 이겨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악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평불만으로 이 악을 이겨낼 수 없다면서 남들처럼 사는 편한 방법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이겨내셨듯이, 우리 역시 이 안에서 주님께 순명하면서 사랑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나의 구원도 가까워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
- 에디 리캔배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
빠알간 제의를 입고 주님 수난 여정에 동참한다. 예수님 일생을 다시 만나는 십자가의 시간이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지나간 길에 사람의 길이 피어난다. 사람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십자가 아닌 사랑이 없다. 십자가의 수난없이 사랑은 완성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며 십자가와 함께 앞으로 나가신다. 최선의 사랑으로 우리를 되살리신다.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다시 감싼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불러 세운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십자가는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게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간절함을 십자가로 만난다. 십자가의 시간 위에 부활이 피어난다. 산다는 것은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마지막이 부활임을 믿는다. 삶의 마지막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봉헌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증언하시고 십자가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일치가 다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십자가이시다.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은총이 피와 물처럼 생명을 다시 흐르게 한다. 십자가 안에 삶과 죽음의 모든 해답 부활이 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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