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13.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4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주간 수요일 -

 

 

2022년 4월 13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주님의 종을 대적하겠냐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파스카 만찬을 드시면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자는 불행하다며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1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0장 4-9ㄴ절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6장 14-25절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이 거룩한 신비로 선포하는 성자의 죽음을 통하여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상인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4월 13일 (수)
한상인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1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며 완성되는 시간

 

오늘은 마태오 복음에 따른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첫 장면은 유다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면 무엇을 해 줄지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줍니다. 구약 성경의 배경에서 ‘은돈 서른 닢’은 율법에 따른 액수입니다. 

탈출기 21장 32절에 “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주인에게 은 서른 세켈을 갚아야 하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즈카르야 11장 12절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값어치로서 은 서른 세켈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이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한편 무교절 첫날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차릴 장소를 묻습니다. 여기서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양을 잡고 집 안의 누룩을 모두 치우는 날로 여겨집니다. 무교절은 파스카 준비일인 니산 달(오늘날의 4월) 열나흗째 날을 포함하여 여드레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명하십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여기서 “나의 때”라고 옮긴 그리스 말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며 완성되는 시간,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영광을 받으실 구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스승’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향한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는데(23,7.8; 26,49 참조), 복음서 저자는 이를 통하여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미리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철면피 되기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인해지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까짓 것들로는 내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종의 노래입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야훼의 종이라면 모욕과 수치를 줘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야훼의 종이 아니면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간적으로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철면피가 되거나 모욕을 줘도 아예 받지 않거나 모욕을 줘도 모욕으로 받지 않으면 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입니다. 우리는 줘도 싫으면 받지 않고, 좋아할지라도 해가 되면 받지 않지요. 

제가 몇 년 전 막노동을 할 때 저희들이 규정에 어긋나게 일을 하였는데 그것을 현장 소장이 모니터로 보고 우리 직속 상급자를 질타하고 우리는 그에게 아주 심한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잡부 중에서도 말단인 제가 욕을 해도 욕을 먹지 않으면 된다고, '그까짓것' 하면 된다고 하니 모두들 얼굴빛이 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나이 많아 힘도 없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저를 다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욕을 해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거나 욕을 해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단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오늘 야훼의 종의 경우는 이런 인간적 모욕 대처를 훨씬 넘어서는 거지요. 

제자의 귀를 가지고 듣습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제자의 귀는 스승의 말을 듣는 귀이고, 스승의 말만 듣는 귀 곧 다른 말은 듣지 않는 귀입니다. 스승의 말 외에는 다 쓸데없는 말이기에 듣지 않는 귀입니다. 

스승의 말 외에는 칭찬의 말도 쓸데없는 말인데 모욕과 수치를 주는 말은 더더욱 쓸데없는 말이지요. 

이는 남의 말을 교만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의 말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 말을 따르다 보니 다른 말은 쓸데없어진 겁니다. 

그런데 스승의 말은 딱 하나,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슬픔과 괴로움도 사랑하는 것이 더 높은 사랑입니다. 

고통을 능가해버리는 사랑, 고통 때문에 더 불타는 사랑을 깨우쳐주시니 수치당하지 않고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고 오늘 야훼의 종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앞에서 모욕당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가 철면피가 되는 것 곧 얼굴의 피부를 쇠처럼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영적 철면피 아니 영적 차돌피를 만드는 법입니다. 

쉽지 않지만 피할 수 없도록 주시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사랑함으로써 조금씩 그리고 나날이 우리의 영적 피부가 두꺼워져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은전 30냥으로 무엇을 잃는지 아는가?

 

오늘 복음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기는 이야기입니다. 죄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면서도 은전 30냥의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을 잃는 것보다 어떻게 얼마 되지도 않는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할까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모든 죄 안에는 항상 은전 30냥의 즐거움이 깃들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를 짓고 남을 미워하는 등의 죄 속에 머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은전 30냥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집을 꺾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며 자신은 의롭다고 느끼는 은전 30냥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은전 30냥으로 더 큰 가치를 잃습니다.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를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이것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더라도 자녀들에게 더 잘해주려 합니다. 자녀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 있기 때문입니다. 

SBS 영재발굴단에서 “엄마, 난 언제 놀 수 있어?”라고 말하는 8살 세윤이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윤이는 매일 11개의 학원에 다닙니다. 그냥 여느 가정의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나 한자 복습 오늘 해야 해? 한자 급수 안 외워도 되잖아.”

엄마는 무덤덤하게 대답합니다. 

“어, 금방 하잖아!”

“놀고 싶어. 엄마 나 그럼 언제 놀 수 있어?”

“놀 수가 없을 수도 있겠네.”

“왜?”

아빠는 식사를 빨리 마치고 “하~ 잘 먹었습니다”라고 답답한 감정을 표현하며 직감적으로 방으로 피합니다. 엄마는 세윤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다가 그만두면 안 한 것만 못해. 갑자기 그만두면 다 소용이 없잖아. 뭐가 남아? 어? 없잖아.”

세윤이는 뾰로통해서 방에 들어가서 억지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갑갑함에 한숨을 쉬며 노래를 듣습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의 꿈이 이뤄지는 날 환하게 웃으세요. 엄마를 생각하면 왜 눈물이 나지. 세상에 좋은 걸 모두 드릴게요. 엄마 사랑해요.”
아이는 눈물을 훔칩니다. 그러며 계속 공부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크면 엄마와 똑같은 아이가 될 것입니다. 

엄마는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만, 자녀를 저렇게 키우며 얻는 은전 30냥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딸에게 사랑받을까요? 자신을 이렇게 이용한 엄마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전교 2등을 하던 딸에게 조금만 더 잘하면 전교 1등 하겠다고 칭찬을 잘해주던 고등학생 딸이 전교 1등을 한 날 “엄마 됐어?”란 딱 네 자를 유서로 남기고 목숨을 끊은 사건은 유명합니다. 

엄마는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은전 30냥만 생각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엄마도 은전 30냥으로 남편과 자녀의 사랑을 잃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은전 30냥은 가집니다. 물론 사랑을 잃으면 그것도 가치가 없어져 결국엔 유다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에 기쁨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벗어나려면 그 기쁨을 위해 잃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은전 30냥은 탈출기에 보면 나의 소가 누군가의 종을 들이받아 죽였을 때 물어주어야 할 값입니다. 

성경에서 소는 뱀과 함께 자아를 상징합니다. 나의 자아를 방치하여 누군가의 종을 죽이게 만들 때 드는 돈이 30냥인 것입니다. 하지만 30냥으로 누군가의 종을 죽임으로써 그 주인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은전 30냥은 결국 뱀의 말을 따라주면서 얻는 선악과를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내가 죄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라고 여겨 십일조로 봉헌한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는 결국 모세가 십계명 판을 깨면서 그들에게 먼지로 마셔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아를 섬기는 값이 하느님과의 계약 단절, 곧 관계 단절을 가져옴을 깨닫고는 자신들이 섬겨온 은전 30냥이 그냥 먼지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한 지혜로운 아빠 엄마가 있습니다. 아빠는 아이들을 방목하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자녀들보다 우선입니다. 아이들보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아빠가 들어오면 자녀들보다 먼저 아빠를 안으려고 자녀들과 싸우며 뛰어갑니다. 아이들한테서 오는 기쁨보다는 남편한테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여인입니다. 

이번 서울대에 합격한 붕어빵 지웅이의 부모입니다. 붕어빵에 아빠 정은표 씨와 출연하기도 했던 정지웅 군은 고등학교 때 래퍼로 대회까지 나가고 결국엔 서울대에 합격하였습니다. 그가 머리만 좋아서일까요? 어쩌면 좋은 머리도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요? 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자녀의 머리도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머리도 써야 좋아지는데, 생존보다는 더 광범위한 시각으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항상 사랑과 은전 30냥과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사랑을 선택합시다. 물론 그러면 은전 30냥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행복인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며 먼지와 같은 순간적인 기쁨을 선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아니겠지요?

 

3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왔던 부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각방을 쓴 지 오래되었고, 결혼생활이 최악이었다고 서로 말합니다. 진작 이혼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때 깨끗하게 갈라지자고 약속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다시 생기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치명적인 암에 걸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서로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완고함이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이제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서로를 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그들에게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통해 상대방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 내가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변화가 비로소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변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찾는 변화를 말이지요. 그 안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면서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질문을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긴 유다도 똑같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라고 대답하십니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 세속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지금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부르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마태 26,21)

 

꽃을 씻겨주는 봄비가 내린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 약속또한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잘 뒤집힐 수 있는 허약한 것들인가.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여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없다. 우리자신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너무 커져버린 우리들 교만이다. 수 많은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성급한 우리자신의 뜻마저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다. 성급하고 나약한 의지가 아니라 간절한 주님의 은총이 필요할 뿐이다.

주어진 신앙이 우리들 삶의 가장 좋은 은총이 된다. 주어진 은총마저 팔아 넘기며 본능으로 치닫는 우리들 삶이다. 신앙과 본능은 함께갈 수 없다. 신앙은 본능을 십자가로 뛰어넘는다. 안주하려는 이 본능을 뛰어넘는 신앙의 새로움이 필요한 성주간이다.

새로운 신앙의 도약이란 주님께 우리의 의지와 본능 교만과 욕심까지 맡겨드리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한 사람은 우릴 살리고 한 사람은 팔아넘긴다.

우리는 주님의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어진 은총이 주어진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우릴 새롭게 하시려는 사랑을 진실로 믿는 새날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