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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0일 (일) 성지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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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가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1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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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0장 4-7절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보는 사람마다 저를 비웃어 대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내젓나이다. “주님께 의탁했으니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구해 내시겠지.”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개들이 저를 에워싸고 악당의 무리가 둘러싸, 제 손발을 묶었나이다. 제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나이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제 속옷 놓고는 제비를 뽑나이다. 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신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저는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 드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필리 2장 6-11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2장 14-71절, 23장 1-5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17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23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33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3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사도들이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이면 넉넉하다.”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41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42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43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47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4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49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51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해 두어라.”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52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54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57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58  
얼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하였다.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59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주장하였다.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60  
베드로는 말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63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며 조롱하였다. 

64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물었다.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65  
그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말하였다. 

67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하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68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것이다.” 

70  
그러자 모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 

71  
그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23,1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4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 18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외쳤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그러자 

23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그분을 모독하였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40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47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48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립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합시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거룩한 양식을 가득히 받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의 죽음으로 저희 믿음에 희망이 넘치게 하셨듯이 성자의 부활로 저희가 영원한 목적지에 이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용덕 야고보 신부 집전

 

 

2022년 4월 10일 (일)
김용덕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22년 4월 10일 (일) 12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완성되는 파스카 신비

 

성주간은 전례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어머니이신 교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한편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핵심이 되는 구원 사건은 하느님께서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파스카 축제입니다. 노예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을 구원하실 때 희생된 어린양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되새기는 축제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파스카 축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본래 의미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이집트 해방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구약의 ‘어린양’을 통한 파스카 사건이 특정 민족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신약의 ‘어린양’을 통한 파스카 사건은 죄의 노예살이를 하던 모든 인간이 참된 구원과 해방으로 넘어가게 해 줍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우리는 성주간 전례를 통하여 묵상하게 될 파스카 구원의 신비를 미리 맛봅니다. 주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고, 그분께 환호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 너머 그분께서 맞이하실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에서 장엄하게 선포하듯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분의 수난과 희생, 십자가 죽음 없이는 이해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파스카 신비가 완성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뭇가지 성사

 

올해는 수난 주일 나눔을 하지 않고 성지 주일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껏 성지주일을 수없이 지내며 성지 축성을 하고 방에 달아놓고는 왜 성지를 1년 동안 방에 달아놓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이번에 문득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성지를 걸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성지는 왜 축성하고, 왜 방에 걸어 1년을 보는 겁니까? 

성지는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밟으시라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과 함께 깔은 가지지요. 주님께서 자기들 도성을 찾아오시는데 아니, 주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시는데 어찌 맨 땅을 밟고 오시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깔은 거지요. 

이는 큰 축제에 관계되는 귀빈을 모시고는 입구에서부터 주행사장까지 주단/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그것을 밟고 들어오게 함과 같고, 경우는 다르지만 김 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진달래 꽃길과 같은 거겠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니까 그 가지가 거룩한 가지인 이유는 주님이 밟으신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거룩함은 주님과 닿기 때문에 거룩한 거지요. 주님께서 와서 닿든 우리가 가서 닿든 주님과 닿아야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이랄까 주일의 거룩한 의미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어하던 그 '간절한 닿음'의 의미이고, 연인의 손을 처음 잡을 때 떨면서 잡는 그런 '떨리는 닿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데 나와 상관없이 오시는 분인 듯 맨 땅을 밝고 오시게 해서는 안 되고 옷을 깔든 주단을 깔든 깔아야 주님은 내게 오시는 것이 되고 나의 옷이나 주단은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지를 깔고 옷을 까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이고 예루살렘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여는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에서 자주 이 시편을 노래하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후렴과 함께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영광의 임금님이 누구이신고. 굳세고 능하신 주님이시다. 싸움에 능하신 주님이시다."라고 노래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지를 축성하여 집에 가지고 가 자기 방에 다는 것은 한갓 장식이 아니라 그것을 볼 때마다 성사가 발생하기 위해 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뭇가지 성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거룩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집에 달았으면 우리 집 대문을 열겠다는 뜻이요 나의 방에 달았으면 나의 방 문을 열겠다는 뜻이며 나의 마음을 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을 열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은 떨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서는 아니 되고 간절하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환영의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큰 소리로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가 그들을 꾸짖으시라고 주님께 청하는데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잠자코 있으면 안 되고 돌같은 마음이거나 돌들보다 못한 마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 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 (1열왕 1,40)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 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 (2사무 6,20)

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 (2사무 6,23)

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 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아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렁텅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 우선 당신을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가 한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 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항상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니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리니.

- 푸시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루카 22,31)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갈채와 환호 뒤에 뒤따라오는 십자가이다. 성지가지 사이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성지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답하신다.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성주간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교만을 아프게 보게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랑의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다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십자가로 삶의 고통을 통과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다시 삶의 길을 만든다. 가장 위험한 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 자아를 깨뜨리는 십자가이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 수 없는 십자가의 진리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을 다시 살리신다. 인생이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의 배움이다. 하늘 아래 하늘나라를 보여주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삶을 알 수 없다. 사라지지 않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또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십자가로 닮아가는 삶의 성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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