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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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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2022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며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들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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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예레 20장 10-13절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0장 31-42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를 보호하시어 온갖 해로운 것에서 언제나 지켜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하정호 안드레아 신부 집전

 

 

2022년 4월 8일 (금)
하정호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까?

 

사순 제5주간에 읽게 되는 복음은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까지 합니다. 이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음의 긴 담화를 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까? 요한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는 신성 모독이라는 논리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기적’이라는 낱말 대신, ‘표징’이라는 낱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기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면, 요한 복음서는 기적이 ‘표징’으로서 담고 있는 의미에 더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그분께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그 작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으려 끊임없이 애를 씁니다. 우리 각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그 의미를 곰곰이, 차분하게 성찰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격상합시다. 인격에서 신격으로!

 

오늘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정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격상합시다! 

한자어에서 격상(格上)이란 격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격상이란 자격을 높이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격을 높이는 것을 말함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인격화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인격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인격화해야 합니다. 요즘 반려견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린이를 태우는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가고, 제가 볼 때 개를 완전히 인간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를 완전히 인격화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프란치스코를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사람은 비인격화하고 개만 인격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비인격화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어떻게 비인격화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을 개돼지처럼 대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인격적 상대로 여기지 않음이 다른 하나입니다. 

개돼지처럼 대하는 것은 비인격화 정도가 아니라 짐승으로 격하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저지르는 죄중에 이보다 더 나쁜 죄가 없겠지만 사람을 인격적 상대로 여기지 않음도 못지 않은 죄입니다. 

그를 관계에서 배제하고, 그를 대화에서 배제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는 것, 이것이 개는 인격화하면서 사람은 비인격화하는 것인데 개도 인격화하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사람은 더더욱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 남을 인격화하면서 자신도 인격적인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인간의 격을 높이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인격자가 되는 것은 엄밀히 얘기하면 격상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게 된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격상은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 모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자녀일 뿐 아니라 신들입니다. 이것이 불경스럽다면 하느님은 큰 신이시고 우리는 작은 신들입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격상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는 유대인들의 말처럼 우리가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면 신이 되고 격상할 수 있는 겁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 신이니 하느님 말씀을 받음으로써 신이 된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주님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아버지 않에 있고 아버지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개가 사람과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인격화된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말씀을 주고받으면 신격화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우리도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말씀 여행은 신부님 휴가로 4월 4일 월요일부터 4월 8일 금요일까지 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우리는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느 의대 교수는 의대생들이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지에 적어낼 때 감점을 아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보통 답을 몰라도 자기 나름의 답을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의대 교수는 의사가 생명과 연관된 직업이기에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진찰하고서 잘 모르겠다며 아무 약이나 처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분명합니다. 
 
추측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측을 삶의 전반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추측, ‘아니면 말고’ 식의 말들,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서 ‘그 사람은 ~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모습 등등…. 
 
이 추측은 과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범했던 죄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기에 돌로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의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에만 해당했습니다. 율법해석가인 랍비 압바우(300년)은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굳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에만 해당하지, 신성모독 죄는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기에, 사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그 사랑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는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참다운 기도란, 내 뜻을 하느님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를 묻는 순간이다.

- 성녀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 8,55)

 

지상의 것에 스며있는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다. 새롭고도 힘찬 생명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에 십자가에서 늘 멀어지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두렵다. 

알기에 닮아간다. 영원하지 않는 이곳에 영원하신 분이 오셨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아시는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을 아시기에 십자가 삶도 아깝지 않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안다. 

앎의 이야기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이시기에 십자가로 사랑의 일을 하신다. 기쁨이시기에 우리와 함께 기쁨이 되신다. 하느님을 알기에 이 여정을 끝까지 가신다. 하느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영원하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영원하다는 것은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하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참된 사랑은 무지(無知)의 가면을 벗겨 낸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순간을 지금부터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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