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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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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주간 화요일 -

 

 

2022년 4월 12일 성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고,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1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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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9장 1-6절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건져 구하소서.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당신 의로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저의 입은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3장 21ㄴ-33절, 36-38절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상인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4월 12일 (화)
한상인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알고 계신 스승,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홀로 수난과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 인간적 번민과 두려움에도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스승님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답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서술합니다.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 사탄이 일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에 어둠과 사탄,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편 스승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메시아의 비밀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무감이 들 때

 

오늘 독서는 어제에 이어 야훼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야훼의 종의 두 번째 노래인데 지금 야훼의 종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힘이 빠지고, 지치고, 허탈감까지 드는 상태입니다. 

야훼의 종으로서 소명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는 중인데 현재까지는 그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심사가 복잡하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마음이 산란한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고생하면서도 근근히 버텼는데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해도해도 안 되는데 괜히 고생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까지 해온 일이 과연 내가 할 일인지, 아니면 허망한 일인지 의심도 들면서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도 들면서 마음이 갈라져 복잡한 겁니다. 

어제는 힘든 하루였습니다. 

원래 주말을 쉬었다가 다시 하는 월요일의 식당 일이 많은데다 손님도 평소보다 배로 많이 오셨고, 문제를 갖고 찾아온 분들의 상담도 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울한 기분이 새벽부터 제 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의 나눔에서 그런 낌새를 채신 분들도 있을 텐데 그래서 저는 어제 사뭇 어두운 나눔을 하였지요. 

그래서 왜 이런 우울한 기분이 제 안에 들어왔을까 생각해보니 하나는 성주간에 들어서면서 주님의 가까워진 죽음이 저를 우울케 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 주변에 제가 사랑하고 그래서 계속 기도해드리는 분들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거나 나빠지는 얘기가 쌓이면서 우울감도 쌓였던 것입니다. 

사실 며칠 전에는 하느님께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물론 제게가 아니라 주변의 아프거나 어려운 분들에게. 

그러다가 이런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데 그분들과 그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내가 이렇게 우울감에나 빠져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악마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그분들을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진정 사랑한다면 내가 이렇게 우울감에 빠져 있었서는 안 되고 '끙'하고 힘을 내야겠지. 

어제는 여기까지 반성하고 새롭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묵상하면서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과 분노만 하였지 하느님께 힘을 얻지 않은 저였고, 하느님 빼놓고 내 힘으로만 우울감에서 일어서려고 한 저였습니다. 

오늘 야훼의 종은 허탈감을 노래한 뒤 이렇게 이어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복음의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배반을 생각하며 심란해하시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렇게 미래를 내다보시며 힘을 내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배반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눈을 두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심으로 희망을 되찾으신 겁니다. 

나든 남이든 인간에게 시선을 두면 우울하고 허무합니다. 희망은 하느님께 시선을 둬야지만 가능하며 먼 희망도 가까이 가질 수 있음을 다시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살아있는가? 산 사람은 살리고 죽은 사람은 죽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는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입니다. 

계명은 누군가의 뜻이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당신에게 영광을 올리면 당신도 미래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유다도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고 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의사는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또 열심히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 이국종 선생의 아버지는 6·25 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알아 국가유공자 의료 복지 카드를 내밀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다 거절당하였습니다. 

오직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너에게 받을 의료비는 없단다”라며 이국종 어린이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이국종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삶의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덴만 작전으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겠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총상이 심해, 마치 떨어지는 칼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자원하여 그를 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딱딱해지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도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에서는 지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선생은 환자를 급하게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비행기를 빌리는데 4억 4,000만 원이었습니다. 외교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국가는 여러 절차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국종 선행은 “이송비 4억 4천은 내가 낼 테니 일단 이송하라”라는 말을 하고 이국종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빌려 한국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석해균 선장은 6개월 만에 두 발로 걸어서 퇴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명세를 치른 이국종 선생 덕분으로 아주대 병원은 유명해졌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팀이 긴박하게 데려와 살리는 환자가 많아질수록 병원은 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돈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추가 비용은 병원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의사들도 자신들이 벌어 좋은 기계를 사야 할 돈들이 다 중증외상센터 적자 메우는 데로 들어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증외상센터로 오시는 분들은 다 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국종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수술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병원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잠도 자지 못하며 일하는데 윗사람과 동료 교수들에게 종일 욕을 먹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국종은 결국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 201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7년 동안 고장 난 무전기를 바꿔 달라는 말만 수백 번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일개 의사가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긴 이국종 교수는 결국 아주대병원에 사퇴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한국에서 다시는 이거 안 할 거예요.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두 번 다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이국종 교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결국 사퇴하고 떠난 소중한 인재’, 유튜브 채널, 그시절그배우]

물론 동료 의사들이나 나라 관리들도 살자고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다 빼버려 소진된 이국종 교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의사지만 결국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 갇힌 현실에서 어떻게 두 부류로 갈리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병원과 나라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전혀 상관없고 이익도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을 살릴 것인가. 병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을 살린다는 것 안에는 ‘내가 살겠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병원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내가 살겠다는 마음이 조금만 들어있어도 누군가는 죽게 되는 데 협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이들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 말에 동의하여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안에 ‘그래야 나도 살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죽이려는 뜻이 아니면 실천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이웃이 죽는지, 혹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 두 부분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누군가는 살리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입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이 필요하여 타인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빛으로 갈 것인지, 어둠으로 갈 것인지는 명확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의 외로움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식민지 쟁탈전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는데, 특별히 영국의 식민지 중 오스트레일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모두 배에 태워 보내 버리면 영국은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 생각했고, 더 번영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이 매우 우수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죄인을 수용하기 위해 점령한 나라인데, 지금은 영국보다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죄인을 무조건 없애면 진정한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차별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분명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늘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악을 그 자리에 없애지 않는 것은 모두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판단과 단죄를 하면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반에도 그들 모두 사랑으로 함께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배반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시지요. 이는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서 자기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둠의 길로 달려 나갑니다. 
 
예수님의 외로움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직접 뽑은 제자가 배신하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는 곧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제자 역시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을 온전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짊어져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장담을 보게 됩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 앞에 호언장담할 때가 많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것처럼,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아무 일도 없으면, 건강이 허락되면, 가정이 평화로우면,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이런 조건이 해결되면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핑계를 만드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은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38)

 

닭의 울음보다 우리의 배신이 더더욱 아프고 더더욱 빠르다. 직접 부르시고 몸소 선택하신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신한다. 십자가보다 앞에 있는 우리의 배신이다. 배신은 부르심의 자격미달이며 신뢰의 뼈아픈 죽음이다. 

배신을 치유하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숨기고 싶은 배신을 건너뛰지 않는다. 변절과 배반을 십자가의 상처로 보게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믿음은 끝없는 우리의 배신까지도 끝없이 끌어안으신다. 

배신과 회개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배신을 통해 우리의 나약함을 다시 만나게된다. 십자가의 용서를 먹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주님을 진실로 만나게 된다. 십자가는 나약한 우리를 향해 끝없이 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우리의 믿음을 깨우는 닭 울음 소리를 다시 듣는다. 다시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사랑과 용서를 진실로 믿는 십자가의 관계에 너와 내가 있다. 배신의 이야기가 사랑과 용서로 바뀌어야 할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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