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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2022년 4월 20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자선을 청하는 불구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 줍니다.
✠ 오늘 복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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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3장 1-10절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화답송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복음
루카 24장 13-35절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자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저희가 옛 죄를 깨끗이 씻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2022년 4월 20일 (수)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미사 안에서 체험될 수 있는 파스카의 신비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클레오파스라는 제자와 다른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킬로미터로, 일반인이 한 시간에 3.5킬로미터가량 걷는다고 보면, 세 시간 남짓 걸어갈 거리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으시자,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길 뿐,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이어서 저녁때가 되자,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하룻밤을 묵으려고 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뒤 그것을 떼어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제야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파스카 신비는 미사 안에서 체험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미사는 성경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말씀 전례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성찬 전례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빨리 포기하는 사랑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오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로 제자들을 동반하시는 주님께 대해 얘기했는데 오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누구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니까 얘기의 주인공이 주님이 아닌 제자들인 것입니다.
두 제자 중 하나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고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엠마오에 사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주님과 함께 상경했다가 낙향하는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돌아가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난 사실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 열두 사도 중의 하나는 아니고, 예수님의 더 큰 제자단 어쩌면 일흔두 제자단에 속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열두 사도에 이어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는 얘기를 전하는데 아마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저의 추측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주님과 함께 상경을 한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낙향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지금 낙심하고 실망한 상태로 낙향을 합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는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것과 비교할 때 이들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제자단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주간 첫날 아침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는데 같은 주간 첫날 아침 여자들이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돌아와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을 다른 열한 제자와 듣고서 떠난 것일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도들은 헛소리라고 생각했다고 루카 복음은 얘기하고, 그래도 베드로만은 무덤에 가 빈 무덤을 확인했는데 다른 사도들은 이마저 포기했고 엠마오의 두 제자는 아예 주님의 제자단에서 이탈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낙심하고 주님께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은 이들,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나타나시어 그 길을 동반하시며 마침내는 다시 제자단에 합류케 하십니다.
이것을 묵상하면서 저는 저희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떠난 형제들이 생각났고, 그들이 떠날 때 저도 그들을 찾아가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저의 여러 실패를 성찰케 되었습니다.
주님과 저의 차이는 결국 사랑의 차이라고 해야겠지만 그 사랑의 차이가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데 비해 저는 몇 번 설득해도 실패하면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일찍 포기하는 것의 차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성소를 일찍 포기한 형제들을 저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에 비해 주님께서는 포기한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저의 또 다른 차이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주님과 비교할 때 제가 동반을 일찍 포기할 뿐 아니라 동반의 방법도 크게 차이 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대충 듣고 성급하게 그리고 훈계조로 설득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오래 경청하고 동감해줍니다.
그러니까 동반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경청에 이은 동감의 사랑도 중요한데 얼마나 남의 말을 경청하느냐, 그리고 남의 실패와 실망과 고통을 얼마나 동감하느냐, 그만큼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빨리 실망하고 빨리 주님 따르기를 포기하는 나는 아닌지, 포기하고 떠나는 형제들을 빨리 포기하는 조급한 사랑의 나는 아닌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으려고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들은 이미 여인들이 빈 무덤에서 천사를 만나 그분은 죽인 이들 가운데가 아니라 산 이들 가운데 계신다는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심한 그들의 문제를 캐내시기 위해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입에서 왜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전혀 물어보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눈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는 것은 나의 욕구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입니다.
저도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였습니다. 집에 어디서 많이 본 아주머니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친구인 줄 알고 어머니 아직 안 들어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쓱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발을 벗고 나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숱이 많이 없으십니다. 그날이 어머니가 처음으로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사람을 못 알아볼까요? 내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시는 분으로 여겼지, 숱이 적은 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셨을 때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머리는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만 생각했습니다. 다윗 왕처럼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부강하게 해 줄 메시아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대화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상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주장하면 안 됩니다. 그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해야 합니다. 내가 청하려는 것은 이미 그분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는 것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주기를 원하십니다.
2020년 세계 부부의 날 ‘올해의 부부상 대상’을 수상한 부부가 있습니다. 노태권, 최원숙 부부입니다. 노태권 씨는 난독증으로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했고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두 아들은 게임중독으로 모두 학교에서 자퇴하였습니다. 노태권 씨 아내는 거의 속아서 결혼했지만,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노태권 씨 43세 때부터 글자 공부시킵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14시간이었고, 공부 시간은 하루에 2~3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한 이후 3년 만에 수능 모의고사를 7년 연속 만점을 맞습니다. 글씨를 읽을 줄도 모르던 바보온달이 평강공주의 노력으로 엄청난 공부의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문제였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일해야 했기에 자녀들은 아버지는 낯설어했습니다. 아이가 어버이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어버이날, 우리 아빠는 무식하고 별 볼 일 없는 막노동꾼이다.”(2006, 5, 8)
아버지는 아이들을 홈스쿨링으로 교육하기로 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거부하며 가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출하려는 아이들의 가방에 사흘 동안 막도동 해서 일한 돈을 나누어 넣어줍니다. 아이들이 나갔다가 후회하고 돌아옵니다. 은총을 줄 줄 안 것입니다. 놓아줄 줄 안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가출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엔 진리가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게임은 며칠 밤새면서 하던 아이들에게 직접 공부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단 5분도 앉아있지 못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5분 공부하고 5분 쉬고를 네 세트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꼭 지켜주고 그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그랬더니 6개월 뒤에는 한 번 앉으면 100분은 집중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두 명 다 서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아버지는 TV에도 다수 출연하고 강연과 책도 내며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올해의 부부상을 받을만합니다.
그런데 2020년 아내 최원숙 님이 채널A, 아이콘택트에 나와 갑자기 ‘이혼 선언’을 합니다. 노태권 씨는 충격에 휩싸입니다. 그동안 잘해 왔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아내는 그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남편은 당신도 좋지 않았냐고 말합니다. 물론 남편도 TV에 출연하면서 이 모든 성과는 아내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비서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좀 쉬고 싶다고 합니다. 안식년 1년만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80이 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직도 난독증이 있는 남편은 아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이 그렇게 힘들었고, 자신은 자신의 꿈만 좇으며 아내의 꿈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연히 원해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내만의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가장 완전해 보이는 부부도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삽니다. 나의 꿈, 나의 욕망에 너무 집중하면 상대의 마음이 이것에 어긋나는 것이 두려워 아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눈을 감아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 내 아내가 될 수 있고, 내 자녀가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내라고 하더라도 노태권 씨는 아내에게도 가방에 돈을 넣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욕망이 우리 시력을 잃게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신들의 욕망에 갖다 맞추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당신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써놓은 것이지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여기에서 당신이 저에게 원하시는 게 뭐예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나의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랬다면 구세주께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해 주는 분이 아니라 피를 흘려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분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리스도이시고 파라오라는 자아로부터 우리를 탈출시켜 하느님의 성막이 되게 하려고 한 번은 깨져야 하는 십계명 판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세속-육신-마귀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읽어야지, 그것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직업은 무엇일까요?
그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그의 작품들이 떠올려질 것입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살바토르 문디 등등…. 이 유명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직업을 화가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본업은 음악가였다고 합니다. 30세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궁정에 초빙되어 노래와 연주를 했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문서에는 그에 대한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에도 비범한 재능이 있다.”
이렇게 그의 본업은 음악가이고, 부업은 미술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음악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미술 작품이 널리 알려졌지요. 이런 이유로 미술가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음악가입니다.
이렇게 지금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먼 후대에 알려지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나를 쓰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점을 기억한다면 어떤 순간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희망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보다 절망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좌절해서 주저앉고 맙니다. 하느님의 힘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약간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신자가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이 굳어지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 바로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과거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죄 많은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는 우리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움직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 겸손으로 믿음이 다져지면서 어느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
- 카를 바르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길을 가는 길 가운데에는 멈춤의 시간도 있다.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함께 머무르고 함께 바라보는 나눔의 시간도 필요하다. 길에서 나누어야 할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니 놓쳤던 뜨거운 사랑을 다시 만난다. 엠마오에서 지울 수 없는 십자가의 수난을 다시 만난다.
십자가 밖으로 벗어난 여기에도 십자가가 있다. 말씀을 기억하고 빵을 나누시는 뜨거운 부활의 동행 그 마음에는 타오르는 십자가의 뜨거움이 있다. 함께하시며 아쉬울 것 없는 예수님의 사랑 그것이면 충분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는가? 굳어지고 차가워진 우리 마음을 녹여주시는 엠마오의 주님이시다. 여전히 빵을 쪼개어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우리의 일상 그 일상을 살아가는 이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하시는 일상의 주님이시다. 마음이 타올라야 눈이 열리고 주님을 알아보게 되는 감사의 일상이 된다.
낙심하며 떠난 엠마오는 오히려 일상의 부활을 다시 체험하는 은총의 따뜻한 찬미가 된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빠져있는 일상은 죽어있는 일상이다. 일상을 되살리시는 뜨거운 말씀이며 훈훈한 빵의 나눔이다. 다시 정성들여 말씀을 되새기며 성찬의 전례를 봉헌하는 우리 일상의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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