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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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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하느님의 자비 주일 -

 

 

2022년 4월 24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자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납니다.

 

 

✠ 오늘 제2독서

 

요한은 파트모스섬에서 그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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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5장 12-16절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묵시 1장 9-11ㄴ절, 12-13절, 17-19절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0장 19-31절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의 발 앞에 엎드려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4월 24일 (일)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 제2주일, 교회는 토마스의 불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들 가운데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여드레 뒤, 토마스를 포함한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구절 뒷부분의 그리스 말 본문을 직역하면,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입니다. 토마스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껏 품어 온 불신과 의심을 내려놓으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이중 고백을 포함합니다. 이 탁월한 표현은 초기 교회 공동체 전례 때 사용되었을 신앙 고백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믿음과 증언, 믿음과 행복이 긴밀히 연결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목격 증인의 증언을 믿음의 토대로 삼습니다. 이러한 신앙 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성경과 성전, 수많은 성인과 이름 모를 이웃의 힘 있는 증언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끊임없이 초대를 받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드레만에 완성된 부활 공동체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를 보며 열등감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나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키나 외모의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고, 공부나 노래를 잘못하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며, 집안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모든 열등감 중에서 영적인 열등감이 가장 딱하고 안타깝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영성 강의를 다른 사람은 다 알아듣는데 나만 못 알아들으면 얼마나 안타깝고, 모두 하느님 체험을 하였는데 나만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의 경우는 더 안타까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만난 부활의 주님을 자기가 만나지 못했으니 같은 제자로서 그 열등감과 그 안타까움이 너무도 컸을 겁니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토마스 사도는 세련되고 노련한 사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약점을 노련하게 감추거나 숨기는 사도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 아버지께로 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을 테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가 나서서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자기의 모름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죽이려 들지도 모르니 주님께서 병든 라자로가 있는 유다로 가시지 말라고 말리는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하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토마스 사도는 자기 속 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고, 잘 모르면서도 어물쩡 넘어가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 그이기에 주님 부활에 대한 의심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이 주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믿고 싶은 것이고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 보고 싶습니다.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실히 믿고 싶은 거라면 이것이 나쁜 겁니까? 왜 나쁩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의심하지도 않고 그래서 확고히 믿지 못하는데도 대충 믿으며 어물쩡 넘어가는 우리 믿음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큰 깨달음을 위해 큰 의심을 하라고 하지요. 

아무튼,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불신을 숨기지 않고 또 영적 열등감도 감추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기의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주님께서는 주님을 눈으로 꼭 보고 싶어하는 그의 열망과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제 생각에 다른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 간의 여드레 부활 체험의 차이는 영적인 열등감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열망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에서도 열등감이 꼭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열등감은 성장과 열망의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늦되었지만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제자들의 공동체 밖에 있지 않고 완전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제 아무런 이탈자 없이 똘똘 뭉친 공동체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우리 공동체에도 토마스 사도처럼 영적으로 늦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동체와 완전히 합류하기 위한 여드레가 필요합니다. 여드레는 그들이 합류하기까지 그들을 위해 공동체가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변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토마스 사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머지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토마스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나머지 동료들이 바보이고 그래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한 명의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에게 죄의 용서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을 죄 없으신 어린양이요, 하느님으로 믿지 못하면 나에게 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토마스도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는 상황이 많이 바뀝니다.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주님도, 하느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찌른 사람이 죄가 없음이 판명되었을 때 그 사람 수준만큼 깨끗해집니다. 상대가 죄가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2021)은 경찰관을 살해한 이유로 감옥에서 20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루스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루스는 다섯 살인 동생 케이트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케이트는 단란한 가정에 입양되고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케이트는 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케이티의 양부모는 20년간 루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지만, 케이티를 위해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루스는 차이나타운의 허름하고 낡은 집에서 생활하며 생선 공장과 목공 일을 병행합니다. 그러나 케이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이전 집에 사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접근금지 명령을 넘어서 동생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변호사는 케이티의 양부모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케이티에게 관심을 끊을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편지를 다 감추었다는 것을 안 루스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렇게 변호사도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루스는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당합니다. 거기서도 경찰관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루스를 좋아하던 남자도 루스가 경찰관을 살해한 사람임을 알고 등을 돌립니다. 루스에게 살해당한 보안관의 두 아들은 루스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러려 하지 않았지만, 루스가 사회에 적응을 잘해 나가자 열을 받은 것입니다. 

케이티의 양부모의 딸인 에밀리는 부모가 하는 말을 엿듣고 루스가 보낸 편지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루스를 만나 케이티가 피아노 연주하는 곳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죽은 보안관의 두 아들은 에밀리를 케이티로 착각하고 그녀를 납치합니다. 한편 동생을 만나도 되는지 허락받기 위해 변호사의 집에 찾은 루스는 변호사의 아내로부터 문전박대당합니다. 그러자 루스가 말합니다. 그때 케이티는 다섯 살이었다고. 다섯 살이 무엇을 알았겠느냐고. 루스는 동생을 위해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에밀리를 유괴했던 스티브는 루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릅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루스는 그곳으로 가고 스티브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려고 뒷문을 따고 들어오던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말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입니다. 이에 스티브도 후회하고 총을 내려놓습니다. 나중에 케이티는 아무 말 없이 언니 루스를 안아줍니다. 

루스가 출소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루스를 보던 이들은 모두가 그녀를 용서 못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루스는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의 죄를 밝혀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다행히 영화에서는 그녀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죄인 취급했던 이들이 뉘우쳤습니다. 케이티도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케이티도 어쩌면 언니가 살아있으면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언니가 출소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는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활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찌른 이가 부모의 죄 없음을 깨달으면 부모처럼 되려고 합니다. 인간을 찔러서는 인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된다면 그분 죽음이 내 믿음이 없는 탓이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3대 테너로 불리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들 중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유명한 앙숙 관계였습니다.

1984년 당시 카탈로니아 지역은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 지역으로부터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출신의 카레라스 역시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순회하는 공연을 하면서 서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공연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 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레라스는 매달 골수이식과 수혈 등 고통스러운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생존 확률은 10%였습니다. 막대한 치료비로 인해 재정이 곤란해진 그는 더 이상 치료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경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그는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르모사(Hermasa)라는 재단의 도움으로 카레라스는 치료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재단에 가입하려던 카레라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준 재단의 설립자이자 후원자가 도밍고이며, 애초에 그 재단을 설립한 목적이 카레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밍고는 도움을 받는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익명으로 재단을 운영해왔던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크게 감동하여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도밍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라스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도밍고처럼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도밍고처럼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모습 자체로 우리가 죄인이고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찔렀다는 죄책감에 그분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고 또 그 부활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찌를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렇게 닮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그리스도처럼 순교하여 온전한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

 

운전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이 운전경력이 이제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처음에는 운전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선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고, 차 속도를 높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차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초보 때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보 때의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신부님께서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사제서품 받고 나서 운전면허를 땄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신부님, 저는 면허 딴 지 벌써 40년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답니다. 소위 장롱 면허 소유자였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못 하는 아주 소용없는 운전자일 따름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실패도 체험하고 피하고 싶은 고통의 순간도 겪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면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지켜주셨던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패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기에, 나중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없어서 제자들의 증언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도 있는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십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말한 대로 손가락이나 손을 못 자국에 넣어 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요. 
 
믿음의 유형은 이렇지 않을까요? 첫째는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보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지막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전혀 없어서, 어렵고 힘들면 곧바로 넘어질 사람입니다. 절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찾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런 환경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환경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 버나드 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 28)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자비는 거창하지 않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자비의 감사로운 실천이다. 그래서 자비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다. 간절하고 진실한 사랑이 십자가의 자비이다. 서로를 살게하는 십자가처럼 자비는 맹목적이지 않다. 

자비는 나와 너를 이어주는 참된 소통이다. 삶의 진리는 언제나 하느님 자비의 끊임없는 체험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덮여있는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의 마음으로 나와 너를 바꾸어 놓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자비의 관계이다. 어떤 관계속에 살고 있는 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을 꿰뚫고 흐르는 하느님의 뜨거운 십자가의 상처에서 자비가 탄생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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