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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2022년 4월 27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자, 사도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칩니다.
✠ 오늘 복음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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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5장 17-26절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화답송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복음
요한 3장 16-21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승국 이사야 신부 집전
2022년 4월 27일 (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홍승국 이사야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7일 (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따르면,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구원을 실현하시는 까닭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성자를 믿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보통 신약 성경 본문들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인류 역사의 끝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성자를 통한 성부의 계시를 인간이 거부할 때 이미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성자를 통한 성부의 계시는 악을 저지르는 자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성부에게서 온 빛이신 성자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갈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하시며,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를 실천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와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계시를 믿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먼 사랑은 쉽지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신 거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또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오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저 하늘에서 내리실 수 있는 겁니다. 심판하러 굳이 그리스도를 파견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당신 아들에게 칼을 들려보내실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면 되는데 왜 아들이 수고스럽게 땅에까지 내려오게 하시고,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까지 하십니까?
또 이런 비유를 들 수도 있을 겁니다.
유학 가 있는 아들을 벌 주기 위해 부모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내고 돈도 보내주었는데 그 돈을 노는 데 탕진한다고 칩시다.
그럴 경우 돈을 보내지 않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굳이 갈 필요 없지요. 갈 경우는 설득을 하든 야단을 치든 아들을 사람되게 하기 위해 가고 한마디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먼 사랑 다시 말해서 멀리서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이 먼 사랑은 쉽습니다. 가까운 사랑이 늘 어렵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고, 가까이 있어도 간격을 두는 사랑이 쉽지 붙어서 하는 사랑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가까이 가는 것은 더 사랑하기 때문이고 더 사랑하기 위해섭니다. 주님께서 오신 것도 이런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라는 오늘 말씀 명심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인 이유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0.21)라고 하십니다.
어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체성은 나에 대한 믿음입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려고 할머니에게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춤을 춥니다. 그런데 일본에 살면서, 그리고 그런 정체성을 유지하는 힘을 얻지도 못하며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빛’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르침으로 우리의 정체성도 알려주시지만, 당신 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할 힘도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니 신자들이 본당에 나올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받았습니다. 바빠서 안 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오늘 이 복음의 내용이 바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내용과 직결됩니다.
진리는 TV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에 힘을 실어주는 분은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실천하겠다고 하는 이는 연료는 채우지 않으면서 차를 운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운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영성의 발전단계를 이해하려면 요한의 신학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율법과 진리와 은총을 구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중략)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4.17)
오늘 말씀과 종합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율법 - 진리 - 은총”입니다. 율법은 사랑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진리로 나아오지 못하면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진리로 넘어오는 과정을 ‘회개’라 합니다.
서울 변두리 경기도 시골에 사는 미정이는 삼 남매 중의 막내입니다. 시골은 서울과 대조되는 인간의 열등감을 상징합니다.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서 고군분투하지만 미정이는 남자친구에게 돈을 떼이고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구 씨에게 독촉장이 오도록 해놓습니다.
미정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을 확인받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미정은 시골에서 술만 마시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한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구 씨에게 말합니다.
“왜 매일 술 마셔요?”
“아니면 뭐 해.”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봄이 되면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예요.”
미정에게 사랑은 추앙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빈 가슴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약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보잘것없는 구 씨를 해방해 준다고 여깁니다. 구 씨는 말합니다.
“너 남자한테 돈 빌려줬지? 사내새끼들도 여우야. 돈 빌려 가고도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들 여자. 알아본 거라고.”
“그 자식이 돈을 갚으면 아무 문제 없을까? 그래도 똑같을 것 같은데. 한 번도 채워진 적 없고 거지 같은 인생에 거지 같은 인간들. 다들 잘난 척.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 말.”
“허. 미안하다. 나도 개새끼라서.”
구 씨는 마지막으로 일침을 날립니다.
“너는? 너는 누구 채워준 적 있어?”
사실 그녀도 누군가를 채워준 적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구 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내가 추앙해 줄까요?”
구 씨는 미정의 날아가 버린 모자를 찾아오기 위해 힘찬 도약을 시작합니다. JTBC 토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일부분입니다.
미정은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모기이기에 관계란 자신의 노력으로 타인의 피를 빠는 노동이 맞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사랑을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진실을 깨닫게 하는 대상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구 씨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했다면 이제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란 자신이 이제 추앙받을 존재가 아니라 남을 추앙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앙하려 해도 이전과 같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으로는 결코 자신 안에서 남을 추앙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몇 번 해보다 실망합니다.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만들어졌을 때 피노키오는 자신을 인간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가지 않고 서커스와 타락의 섬으로 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낭비합니다. 천사는 피노키오에게 겉은 나무 같지만,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나무는 거짓말해도 되지만 인간은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안 되는 인간입니다.
피노키오가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진리에 다다른 순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제페토 할아버지는 큰 고래의 배 속에 있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나왔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힌 것입니다.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구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만에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 줄 수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람이요, 아들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오는 믿음, 그것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진리를 거쳐 가는 ‘빛’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로 믿고 싶은데 성체를 TV로 미사 보는 것을 원한다면 말이 되는 것일까요? 피노키오가 자신이 인간이라면 아버지가 물고기 배 속에 있는데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추앙하게 만든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죽음이라는 물고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치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임을 믿을 수 없기에 성체로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와 빛은 하나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가 성체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성체가 곧 빛이신 그리스도이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를 실천할 유일한 힘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향해야 자신이 하는 일, 곧 진리를 실천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야! 친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니? 우리 다시 보지 말자.
어느 형제님께서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그 정도까지는 도저히 해줄 수 없다고 하자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집 담보로 해서 대출받아야 빌려줄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정말로 친하고 귀한 친구였지만, 자신의 영역 밖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거절했지요. 이 거절에 쏟아진 친구의 말에 죄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친한 친구이니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제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빌려주었지요. 그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친구니까요. 하지만 이 친구를 20년 넘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연락 한 번 하지를 않습니다(연락처가 바뀌어서 저도 연락할 수 없습니다).
사실 친구는 나의 생존이나 경제적 이득에 상관없이, 그저 ‘관계’가 좋아서 곁에 두고 교류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 생존과 경제적 이득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친구가 아닌 ‘약한 유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이런 식으로 가까운 관계를 근거로 자기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대신 좋은 관계에 집중해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존재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함께 해야 할 분, 특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할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영원한 생명이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단순히 한 번 보고 끝날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으로 끝날 관계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할 분이 아니라, 내 세속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문제만 해결해달라고 하면, 함께할 수 있는 깊은 사이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께 그런 세속적인 문제의 어려움만 이야기할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온종일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의 조합이다.
- 조셉 머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요한 3,21)
너무나 사랑하면 모든 존재는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고 가장 좋은 순간을 나눌 수 밖에 없다. 봄이란 계절 또한 사랑처럼 가장 좋은 연두와 초록을 우리들에게 내어준다. 이와같이 가장 좋은 아름다움은 내어주는 사랑과 함께한다.
함께하는 참된 사랑이 참된 진리이며 참된 사랑이 참된 빛으로 우리들 가운데 드러난다. 참된 빛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를 진심으로 성찰하게 된다. 하느님 사랑은 가장 소중한 당신 생명을 우리들에게 내어주시는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한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과 심판 절망과 어둠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사랑의 빛이다. 다시 하느님을 믿게하는 사랑의 빛이다. 사랑의 빛을 떠날 수 없는 사랑에 빚진 우리들이다.
사랑의 빛으로 우리는 삶 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게되었다.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사랑이다.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빛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 길이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이다. 진리를 실천하신 예수님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빛이시며 끊임없이 빛으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또한 빛이 되었다. 하느님 사랑을 사랑하게 되는 빛의 구원이다. 빛은 멸망이 아닌 빛은 심판이 아닌 빛은 어둠이 아닌 빛은 악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드러나는 가장 좋은 사랑이다. 부활은 가장 좋은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다. 그 진리이신 사랑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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