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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9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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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2022년 4월 29일 (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380년에 선종한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들은 매질을 당한 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의회에서 물러 나왔지만,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라고 날마다 선포힙니다.

 

 

✠ 오늘 복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고,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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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5장 34-42절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6장 1-15절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복된 가타리나가 천상 양식으로 힘을 얻어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으니 저희도 이 양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 집전

 

 

2022년 4월 29일 (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9일 (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방법.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어떻게 삶에서 실천할지 묵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율법 교사이며 바리사이였던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에서 발언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타르수스의 사울, 곧 바오로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뒤 사도들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유다교 지도자들은 술렁거리며 흔들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가말리엘이 연설을 합니다. 

만일 사도들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없앨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기존 종교 형식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가능성을 열어 놓고 유연성을 갖춘 합리적이며 겸손한 태도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들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는데, 주님의 갈릴래아 공생활의 정점이자 종결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부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럽게 되실 하느님의 종이시기에 군중의 기대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에서 위기와 어려움에 부딪히며 살다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모습에 사로잡혀, 자칫 모든 불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듯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에서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어쩌면 멀리 돌아가는 길, 곧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영광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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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신은 왜 생기는가?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이 기적은 ‘산’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도 광야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라고 대답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여전히 자기 능력에 의존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숫자 ‘12’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민족이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려면 먼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빵이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선악과로 배를 채웠습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척박한 땅에 살면 사람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빵은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살립니다. 그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고 에덴동산이십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헛것을 보며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척박한 땅에 사는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 욕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입니다. 

욕구에서 벗어나지면 그냥 자연은 자연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할까요? 왜 우리는 사진을 찍어놓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았느니, 성모님을 보았느니, 천사를 보았느니 하며 놀라워할까요? 

점이 많이 찍혀있는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상상으로 동물이나 자연의 일부분, 혹은 무기와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경우를 상상하도록 했고, 두 번째 그룹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휴양지에 놀러 와서 편히 쉬는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상상 훈련을 통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을 보는 두 그룹의 결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저건 뭐 그냥 점들만 찍어놓은 거네요”라고 대답했고, 첫 번째 그룹은 무의미한 점들 가운데서 동물, 나무, 단어 등 온갖 것이 그림에 담겨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조: ‘마음의 법칙;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널리 퍼지는 이유’, 폴커 키츠, 포레스트북스]

이렇게 내가 불안한 상황에 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착각해서 자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모두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둘 다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나뿐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을 만나야 합니다. 

옛날 공주 지방에 한란이란 이름의 총각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그래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지만 손대는 것마다 잘 키워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시장에 나갔다가 누군가 팔고 있는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잉어를 나무를 판 돈으로 사서 강에 방생해줍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아이는 처음이구나. 그런 마음이라면 흉한 땅에 가서도 살기를 녹여버릴 수 있을 게다. 동쪽 오송벌로 가거라.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땅이지만 넌 큰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게야.”

잠에서 깨어난 한란은 너무나 생생한 꿈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오송벌은 엄청난 황무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려고 하면 지네신의 저주받는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황무지 북쪽에 지네창이라 불리는 흉가에 커다란 지네가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산 여인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고 3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출도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 윤달이 오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윤달이 왔고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 온 한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을 본 한란은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갔을 때 한란은 지네창으로 향했습니다. 집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의 뼈가 너저분하게 있었습니다. 지네의 냄새가 났습니다. 여인은 기절한 상태로 기둥에 묶여있었습니다. 한란은 처녀를 구해왔지만, 지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혼인하여 열심히 일하여 황무지를 엄청난 곡식 지대로 변화시켰습니다. 만석꾼이 된 한란을 보며 마을 사람들도 지네창을 불태우고 황무지를 일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땅을 파보니 그곳의 퀴퀴한 냄새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네창을 팠더니 물이 많이 나와서 황무지에 물을 댈 수 있었고 그래서 모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주 한 씨 시조 한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출처: ‘금 손 총각과 처녀 제물; 청주 한 씨 시조 한란’, 유튜브 채널, 노가리 사랑방]

왜 한란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지네신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손만 대면 황무지에서도 곡식이 잘 자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싫었거나 혹은 그 황무지에서 그런 축복이 올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은 그 핑계를 지네신에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지네신을 만들어놓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물줄기가 있는 그곳을 파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신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을 버리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이유를 대기 위한 자기합리화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나를 휴양지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이런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내가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셨고 제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보는 이를 선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한란과 같이 모두를 먹일 수 있는 에덴동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람이 헛것을 보며 나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은퇴 후 시골에 내려와 사는 어느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도 그처럼 은퇴한 후 내려와 사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이 둘은 아주 친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옆집 이웃이 형제님에게 말합니다. 
 
“이번에 이 동네에 이사 온 사람도 우리처럼 은퇴 후에 이곳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한 번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와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이 형제님은 물었습니다. 
 
“은퇴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데?” 
 
그러자 이웃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에 형제님께서는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과거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은연중에 과거를 통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려고 했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과거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를 알면 이상한 선입관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면 따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계사라고 하면 깐깐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또 정치인은 겉과 속이 다른 것처럼, 사업가면 자기 이익만을 챙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정확하지 않은 예측일 뿐입니다. 일 자체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제일 중요합니다. 과거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산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다른 현재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곳은 아주 외딴 넓은 공터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싶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던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적어도 노동자의 이백 일치 품삯이 있어야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필립보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고, 과거의 경험에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굳이 과거의 경험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들 모두 배불리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총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

- 앨리스 메이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요한 6, 12)

 

버려지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고 쪼개어지는 것에서 다시 깊어지는 우리들 믿음이다. 버려지는 것을 다시 살게하시는 복음이다. 남은 빵의 조각도 참으로 소중하다. 빵의 조각처럼 점점 작아지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작아지시고 우리들은 점점 커져만 간다. 

매일매일 사랑을 먹어야 사는 우리들이다. 십자가의 빵은 산산조각이 난 부스러기로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을 말씀하신다. 빵의 행복은 빵이 되는 행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부서지고 먹히는 생명의 빵이 있다. 부서지는 생명의 빵이 있기에 살아있음이 정녕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삶의 조각들을 모으면 감사가 된다. 버려지는 감사의 기쁨들이 우리들에겐 너무 많다. 참된 기도는 삶의 부스러기까지 나누며 노래하는 것이다. 모두 다 내어주시는 주님이시다. 버려지는 것에서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한 주님을 다시 만나는 부활이다. 

버려지는 것 부수어지는 것 쪼개어지는 모든 것은 부활을 닮았다. 단단한 자아의 껍질이 부수어져야 빵이 되고 부활이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자아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부서어지고 쪼개어지는 조각난 빵이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조각들을 모으니 은총이 되었다. 버려지는 조각들과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을 다시 가르쳐주시는 부수어지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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