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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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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2022년 4월 28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들은 대사제의 심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용서받게 해 주셨으며 성령께서 이 일의 증인이시라고 대답합니다.

 

 

✠ 오늘 복음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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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5장 27-33절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3장 31-36절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인성 황석두 루카 신부 집전

 

 

2022년 4월 28일 (목)
황인성 황석두 루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증인’, ‘증언’이라는 표현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대사제 앞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나무에 매달아 돌아가시게 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를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들의 이 증언이 참되다는 것은,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의 ‘독립적인’ 묵상으로 여기는 것이 문맥상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그는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 증언하신 내용은 성부에게서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이는 성부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은 내재적 삼위일체론, 곧 세 위격이시나 한 실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친교와 일치를 표현합니다. 성부께서 교회에 보내신 성령께서는 파스카 신비로 완성된 성부와 성자의 구원 업적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며 교회 구성원인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도 운명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사도들은 아주 담대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신들이기에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언표가 왜 대단하지는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대사제와 유다 지도자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끌려나와 심문을 받는 상황이고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대답하는 겁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시 따위는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대답이지요. 똘마니로 치면 주님의 똘마니지 너 따위의 똘마니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자부심과 정체성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오기가 필요하다면 이런 오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것 이상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세상 지도자들과 한가하게 오기 싸움이나 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거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대는 오직 주님이지 권력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할 것은 오직 순종 뿐이며 써움이 아니고,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하기에 감옥에 갇혀 있을 시간조차 없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순종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교회는 대표적인 복음적 권고로 가난, 정결, 순종을 얘기하고, 순종을 얘기할 때 교회 장상의 명에 순종할 것을 얘기하는데 그 순종이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장상의 명이 하느님 뜻과 다르다고 판단되면 오늘 사도들처럼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답해야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프란치스코도 장상에게 무조건 다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생활과 반대되거나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명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범죄나 죄를 저지르게 하는 그런 순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는데 제 생각에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곧 살라는 명령과 죽으라는 명령에의 순종입니다. 

살라는 명령에의 순종은 생명에의 순종이고 그래서 순종이라는 말보다 순명이라는 말이 옳을 듯합니다.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여 생겼습니다. 어떤 생명도 생기라는 명령에 불순명하지 않았지요. 그러므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 생명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한 생명인 우리는 이제 죽으라는 하느님 명령에도 순명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하며 그래서 누가 죽었을 때 운명하셨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운이 다해 명이 끊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고, 생명과 마찬가지로 운명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우리의 생명과 운명이 다 하느님 뜻에 달려 있음을 묵상하며, 그러나 우리의 생명과 운명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음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은 곧 사람이다 ; 말씀(말+숨)이 흐르게 하라.

 

오늘 복음도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아드님이 하느님이 되시는 방식입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통해 당신 ‘말씀’을 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주시는 피입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나의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신다기보다는 나의 말을 불태우십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쉼 없이 재잘대는 자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나는 자아와 하나가 되고, 반면 성령으로 자아를 죽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가 주말에 자녀들이 공부하지 못하게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자녀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이때 김하얀 씨가 어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토를 다느냐고 남편 편을 듭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말농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김하얀 씨는 여기에서 남편의 말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남편의 것은 다 아내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을 받아 전하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전부인 하느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아드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지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드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곧 신성을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예수님은 거부하시지 않고 오히려 옳은 말로써 당신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으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신이라” 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이 되셨습니다. 본래 신이시지만 세 분이 한 신성으로 하느님이 되셔야 하기에 누군가는 파견하고 누군가는 파견받고 누군가는 파견하신 분의 말씀이 파견된 이를 통해 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이 한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화 ‘바람’(2009)는 유명 배우 정우의 실제 고등학교 이야기입니다. 정우는 엄한 아버지와 더 무서운 형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과 누나는 공부를 잘했지만, 정우는 공부를 못하여 상고에 진학합니다. 상고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담배 피우고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는 일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버지와 형에게 꼼짝 못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로 학교 폭력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들에 의해 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나오기는 했지만, 부모님은 정우가 빼앗은 돈의 열 배씩 돌려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정우의 가방 속의 담배를 보고 뺨을 때리고, 형은 더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정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간암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그때부터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목욕탕에서 등을 한번 밀어드리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우는 장례식장에서 오열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아버지 사랑합니다.”

군대에서 돌아온 형은 정우를 보고 “다 컸네!”라고 합니다. 정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갑니다. 

며칠 전에도 예로 들었듯이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줄 알면서도 할머니에게 계약서에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사인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우도 자신의 말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와 형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는 것은 피이고 성령입니다. 말로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을 하게 만드는 힘이 성령, 곧 피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정우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제 아버지처럼 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말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자아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으며,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말이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피를 준 이의 말을 하도록 합시다. 정우는 친구들이나 선배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만큼 자신에게 피를 흘리며 말을 가르친 이들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곧 누군가를 계시하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됨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말씀을 ‘말’(진리)과 ‘숨’(은총)의 결합이라고 하듯, 성령과 함께 오시는 말씀만이 나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생명이 섞인 말씀을 받아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타자의 생명을 먹고 생존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말을 받아 전하는 것이 곧 그 말씀을 하시는 분과 하나가 됨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 위해 그분께 다가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생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응원하는 팀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최악의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질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습니다. 
 
저녁에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졌을 것으로 생각했던 경기에서 막판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며 행복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 감정은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통해서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내 생각을 통해 얻은 행복이 아닐까요? 운동 경기 자체가 행복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경기를 바라보는 내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나의 감정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분명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은 내 모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상황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상황을 대하는 내 감정은 분명히 바뀌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젯밤 꿈꾼 것을 두고 계속해서 연연하며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이니까 그냥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를 흘려버릴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두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믿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을 믿지 않는 방향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 위치시킵니다. 결국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될 때는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또 그런다.” 
 
그때 내 생각을 다시 전환할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을 향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노동은 인생을 감미롭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힘겨운 짐이 아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노동을 싫어한다.

- 빌헬름 브르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6)

 

생명의 봄날 속에서 감사와 찬미를 깨닫게된다. 우리의 호흡에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난다. 생명 없이는 다른 무엇을 결코 할 수 없는 우리들이다.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영원한 생명이 가고자 하는 길이 바로 믿음이다. 

생명 한 가운데에 계시는 믿음의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으로 믿음을 실천하셨다. 믿음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믿음은 잡고 있는 것을 놓아 버리는 부활의 체험이다.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방향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믿음과 생명 생명과 하느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과 사람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 이 모두에는 믿음과 생명이 존재한다. 믿음은 살아있는 생명의 정신적인 가치이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복음의 가치이다. 

한 순간도 하느님 생명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다.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믿음이 이 땅에 오셨다. 쉼 없이 흐르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진정한 믿음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된다. 영원한 생명은 이와같이 멀리있지 않다. 

생명을 만나는 인격의 가치이며 살리시고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올바른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시는 믿음의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질서가 믿음의 질서임을 순종을 통해 배우는 생명의 길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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