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3주일 -

 

 

2022년 5월 1일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들은 신문하는 대사제에게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 오늘 제2독서

 

요한은 모든 피조물이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무궁하기를 비는 소리를 듣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물으시고는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5장 27ㄴ-32절, 40ㄴ-41절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 무렵 대사제가 사도들을 

27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묵시 5장 11-14절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나 요한은 

11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1장 1-19절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오는 사도들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정우 후고 신부 집전

 

 

2022년 5월 1일 (일)
박정우 후고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나를 따라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어쩐지 제게는 어정쩡해 보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으니, “네! 사랑합니다.” 하면 될 것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돌려 말하고 있을까요?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닥쳐오면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모두 떠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호언장담합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그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하며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해하던 베드로였건만, 결국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잡아뗍니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마르 14,66-72 참조).

그래서였을까요? 베드로는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예수님께 더 이상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스승을 배반하기까지 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만은 제발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부족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란 우리의 두 손에 주님께서는 교회와 이 세상의 미래를 맡기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힘을 내어 오늘도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사랑과 약함을 다 아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작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에 비교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분명 사랑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사랑하냐고 물으면 팔을 둥그렇게 그리며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답하는 아이들에 비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크기를 알기에 그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처럼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아시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십니다. 

주님의 물으심은 과거적 사랑 그러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사랑이 아니라 미래적 사랑 그러니까 지금부터 앞으로 사랑하겠냐고, 곧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이것은 고백 성사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은 모르시기에 실토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아심에도 뉘우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을 위해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양 떼를 위해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며 결국 당신께 대한 사랑 의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양 떼를 사랑하고 잘 돌보겠는지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부탁하십니다. 이는 마치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먼저 죽으면서 아이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내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않을까 봐 염려하여 부탁하는것이 아니라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 물으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해 세 번의 사랑 고백을 요구하신 측면도 있지만 이제 당신 대신 그리고 당신 없이 당신 양들을 돌봐야하는 베드로의 고통을 헤아리며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마음 다지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죽어야 할 베드로의 베드로의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베드로도 그렇고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분을 따르게 마련이지만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분의 십자가 길까지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없는 우리지만 우리의 사랑과 약함까지 아시는 주님을 믿고서 사랑의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숫자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배는 7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들’(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의 숫자 값은 ‘153’)을 잡는 교회를 상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교회에 부활하신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나타나셔서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면서도 그분 말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크게 볼 줄 아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 주인을 죽였으니 참 주인이신 ‘나는 나’이신 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벽히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겸손이 그 모범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입니다. 

한 번은 제가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할 때 어떤 분이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더 공부한 많은 신학자가 있는데 그들이 전부 틀렸고 저만 맞았다는 말이냐고 다그쳤습니다.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무서운 눈초리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이런, 교만한….”

또 어떤 신부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는 말에 대해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신데 한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럼 우리가 신학생 때 배운 게 잘못됐단 말이야?”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교만한 것이라 말할까요? 자신을 낮추고 무조건 자신이 틀렸다고 해야 할까요?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것을 외우며, ‘내가 우리 민족을 중흥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란 말이야?’라는 말을 했지만 아무도 긍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혼자 맞는다고 주장하면 교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장사였습니다. 성인은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을, 그다음에는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악마가 십자가를 보고 도망치는 것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가 가장 힘이 센 분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은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은수자는 성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성인은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지 못하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을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를 어깨에 앉히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물살은 더욱 거세져 마침내 강을 건널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너무 무거워 마치 세상을 짊어진 것 같구나!”라고 하자 어깨에 앉은 어린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너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를 짊어지고 있다.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성인의 원래 이름은 레프로보스였지만 그리스도를 업는다는 의미로 크리스토포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성인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존재였다가 어린아이조차 제힘으로 업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자각해나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지려면 약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고 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다는 말에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크심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하느님의 엄위를 본다면 내가 먼지처럼 작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도 혼자 힘으로 작아지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주님을 뵐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주님은 절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크심에 나는 끊임없이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이 영성의 진전을 위해 끊임없이 세상 것으로부터의 이탈과 겸손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처음에 설악산 권금성에 올라갔을 때 그 놀라운 광경에 신이 나서 절벽 끝을 뛰어다니다시피 하였습니다. 기껏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서 산을 정복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산이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와 옷이 부풀었고 자칫 바람 때문에 날려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그때 저 자신의 작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악산은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사제가 되어 다시 그곳에 올라왔을 때는 기분이 달랐습니다. 저는 한 발짝만 뒤로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산이 커지니 내가 작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산이 커졌을까요? 주님이 만드신 것이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 창조 일부분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산이 커진 것입니다. 

겸손은 고양이가 쥐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겸손은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비법은 이것입니다. 내가 작아지려 하지 말고 내 주위에 있는 것들, 사람들의 크기를 키우는 것입니다. 무대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지 않으려고 연습을 죽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중을 하느님으로 보고 압도당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란 기도를 계속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다 보면 혼자 있을 때는 주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의 창조 능력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쨌건 사자 앞의 고양이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목소리에 순종하게 되고 그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의 노력은 참 그리스도를 뵈옵는 관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은 가장 작은 이를 통해서도 나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영성의 유일한 지향점은 그분의 커지심과 나의 작아짐입니다. 

처음 베드로가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보고 자신을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작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뛰어갑니다. 겸손해지는 맛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님 아니면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제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물론 전임 신부가 보던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인해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아서 치워버렸습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채널이 있습니다. 전에는 공영방송만 있어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케이블방송에 종편까지 너무나 많은 채널이 있어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번은 바쁜 일과를 모두 끝내고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때 채널을 하나하나 옮기면서 무엇을 방송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뉴스, 스포츠…. 이렇게 채널을 돌리다 보니 1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것입니다. 1시간 동안 리모컨 버튼만 누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도둑이라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치웠지요. 
 
우리 삶에는 전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영향을 받고 있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전념하지 못하는 것들도, 다른 것들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지요. 이는 교회의 상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제자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서 인간적인 모든 예상을 뒤엎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여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특별히 이 기적 후에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십니다. 이는 교회를 맡기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우선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시지요. 이때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전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함께하면서 이런 자신감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대신 담대히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질문하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다 아신다고 겸손하게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는 주님 앞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념해서 굳은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사실 이런 부족함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전념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디서 무얼 하건 적당히 대충하지 말라. 열 가지를 해야 한다면 스무 가지를 하라.

- 데니스 웨이틀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성모성월 오월은 사람을 물들이고 공동체를 물들인다. 사랑의 시작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빛나지 않은 것이 없는 모두가 푸른 사랑의 오월이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태어나는 사랑의 푸른 새날이다.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성장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랑 연약함을 모르는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와 연약함까지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랑으로 변했다. 사랑은 사람이 되게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복음은 우리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이란 서로를 돕고 보살피는 사랑의 참된 만남이다. 사랑은 지나가버린 어제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 이순간이다. 예수님 사랑의 일생이 바로 뜨거운 부활이다. 뜨거운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허약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로 바뀌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부활의 사랑이다. 부활은 헤피엔딩이다. 오직 사랑뿐인 부활의 길이다. 세 번의 닭울음 소리에도 다시 돌아와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참사랑을 체험한 까닭이다. 

십자가와 그림자 그늘과 연약함을 사랑하는 부활이다. 그래서 부활은 어머니같이 아프고 뜨겁다. 예수님, 당신의 일생에 풍덩 빠져 예수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공동체의 사랑이 부활의 당부이며 부활의 선물이다. 

공동체에서 다시 시작하는 오월의 첫날이며 부활의 생명 실천의 새날이다. 생명은 사랑으로 아름답고 생명은 실천으로 사랑의 연대를 이루어간다. 사랑의 뜨거운 것은 십자가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오월의 사랑, 공동체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