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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3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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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2022년 5월 3일 (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3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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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4장 6-14절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문세영 필립보 신부 집전

 

 

2022년 5월 3일 (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문세영 필립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3일 (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또는 교의 신학적으로 그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태어난 지 단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자로,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아온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온전히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씀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생애를 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분노에 찬 이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다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성인의 삶과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또 그분의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헛되이 믿는 것이 아니려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헛되이 믿는 것과 참되게 믿는 것을 얘기하면서 헛되이 믿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은 헛되이 믿는 믿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헛되이 믿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오늘 저는 복음에 비추어 보겠습니다. 

참되게 믿으려면 필립보처럼 열망이 있어야 하고, 열망에서 비롯된 궁구窮究가 있어야 하며, 궁구에서 비롯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봤으면 아버지도 뵌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당신 안에 있는 것을 믿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제 눈에는 그것이 마치 윽박지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는데도 못봤다고 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데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은 아뭇소리 못하고 있는데 필립보 사도가 용감히 나서서 자기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니 뵙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미 뵌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필립보 사도는 아직 못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를 뵙는 것으로 충분하겠다는 말은 아버지를 뵙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필립보는 아직 뵙지 못했지만, 뵙고 싶은 열망이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열망은 없고 오직 이것이 자기의 열망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필립보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단에 속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제자들 앞으로 지나가자 세례자 요한이 저 앞에 지나가는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시라고 가리키고, 그러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가 주님을 따라가 보고는 베드로에게 말하고 그래서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필립보는 그들과 같은 고향이었으며, 이들에 이어 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면 같은 제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필립보는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을 찾던 사람, 곧 구도자였고 궁구자였던 것이며 뵙고자 하는 열망이 컸던 사람입니다. 

궁구자란 궁구하는 자라는 뜻이고 궁구한다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는 것을 말함이지요. 몰라도 대충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끝까지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끝까지 알고 싶었고, 하느님을 주님께 들어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눈으로 직접 뵈어서 알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보고 싶어하지 않고 동료 사도들도 같이 뵙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뵙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만 충분하다고 하지 않고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이 믿는 것이 아니려면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처럼 처음에 믿는 것이 실패했을지라도 끝까지 구도의 열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족하기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본성,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통역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을 이분은 그리스도라 확신하십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을 때 이분은 우선 출세와 정의 중, 어떤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부 독재와 그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지식인층,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들 부류에는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에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60, 70세가 되어도 인생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상한 환시 같은 것을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창밖의 노을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천아 봐라. 저것이 인생이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이리저리 공부한 후에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까지 된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교황님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신부는 교황님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교황님은 그 노을을 보며 예수회에서 살다가 간 위대한 성인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참 진리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정 신부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 신부는 그때 노을보다도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압도되어 온전한 길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분은 항상 도달한 분이 아니라 ‘도정’에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담 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직접 그 길을 가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봅시다. 얼마 전 이태석 신부의 제자인 토마스가 의사가 되어 유퀴즈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토마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고, 그리스도의 삶의 계시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와 같은 반대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아니, 길이고 거짓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알로이스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아이를 열등감의 길로 가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된 진리를 드러냈고 결국엔 자살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훗날 독일 수상이 되고 비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회수를 새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의 길이 되어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려면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알에서 태어나서 나뭇잎을 먹으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애벌레 탑을 올라갑니다.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둘은 경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탑을 오릅니다.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태로워 보이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 그는 고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에게 그 고치를 만들고 있던 애벌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대상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같은 애벌레라는 것입니다. 나비는 애벌레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자라야만, 곧 내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그 사람을 이미 나비가 되신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파견하신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부족하게나마 걸어본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태석 신부가 되어 사는 것보다 이태석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토마스에겐 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로 가고 있는지, 거짓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리며 거짓으로 향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거짓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그 사람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분의 말 습관 중에 “아니죠”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심하다 싶게 “아니죠”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점점 이 분과 함께 하는 자리가 힘들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얼마 뒤 다른 분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앞의 분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제 말에 “맞아요.”라면서 맞장구를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분과의 대화는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지나간 것 같았습니다. 
 
이 두 만남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대화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 “아니죠.”라고 기도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기도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아마 나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만 늘어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맞아요”라고 하면서 기도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과 진정한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신나 하시며 이런 나와 함께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신만 따르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곧 진리요 생명이시니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 이론가로 통하는 필립보가 나서서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필립보를 향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간직하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도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향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없이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어떻게든 믿음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일상 삶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 “아니죠”라는 부정적인 말로 과연 대화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모든 일을 인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맞아요.”라는 말의 시작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작은 걸음이 당신을 더 만족스러운 목표로 데려갈 것이다. 비행기는 경로를 살짝만 바꿔도 수천 킬로미터 후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다.

- 미리암 융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 9)

 

무엇이 삶의 핵심인지를 묻게 되는 시간이다.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보아야 만날 수 있고 만나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세상적 가치를 버릴 때 복음의 가치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아집과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실천의 길이 복음의 길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 곧 참된 평화를 전하는 삶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만나는 새로운 기쁨이다. 인생전체를 이끌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되시는 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버지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하기에 저마다에게는 가야만 할 길이 있는 것이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는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영원하신 주님을 따랐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을 수 있는 따름의 참된 진리이다. 

행복의 출발점이 되시는 예수님을 다시 뵙는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을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신다. 삶다운 삶을 하느님과 하나되는 진짜 행복을 만나게 하신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나고 있는 지를 묻게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행복한 오늘이다. 삶의 핵심은 삶으로 오신 삶이 되시는 우리 삶의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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