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2022년 5월 5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필리포스는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만나 세례를 주고,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누구든지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복음
요한 6장 44-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한별 도미니코 신부 집전
2022년 5월 5일 (목)
이한별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5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또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들 또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형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사제가 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라며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일선 본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평과 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떻게 성체를 모실 수 있지?”
오늘 제1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전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을 여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방인에게, 그것도 이방인 여왕을 섬기는 내시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 내시가 하느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베풀어진 세례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은 이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성경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글자 하나로 뜻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강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기보는 강조점이 있는 것일 겁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라는 번역은 다른 것이 생명의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빵을 찾지 말고 당신을 찾으라는 뜻도 있는 거구요.
예를 들어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고 우리는 산삼이니 영지버섯을 찾는데 그런 것들을 찾지 말고 참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만나를 운운하는데 그것이 생명이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오늘 다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강조점이 '내가'가 아니라 '생명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죽음의 빵이 아니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죽어 있는 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씀이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효모와 유산균이 죽어 있는 살균 막걸리에 비해 생막걸리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생명이 생동하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는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약으로 치면 알부민 주사와도 같은 것일 겁니다. 제 친구가 살아 있을 때 아주 가끔 알부민 주사를 맞았는데 그것을 맞으면 신기하게도 반짝 생기가 돌곤 했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일지라도 그것을 믿고 간절히 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늘 빵보다도 맛없고 그래서 원치 않는 빵일 뿐입니다.
어제와 그제는 저의 식당에 젊은이들이 와서 봉사를 했습니다. 일은 어른들보다 서툴러서 제가 많이 그리고 더 힘들었지만, 식당에 생기가 돌고 저도 싱싱한 피를 수혈받는 듯 힘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근자에 만났던 다른 젊은이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고 특히 그 아까운 젊음을 허비하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젊은데 시들시들하고, 사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의미는 없고 재미로 살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잃거나 가져본 적이 없이 살다가 그리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생명이 주어졌고, 어떻게 해야 생명을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기에 생명이 귀중하지 않고 생명이 있어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소중한 이유, 태어나기는 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그래도 태어난 것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 영원한 생명을 생각지 않으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사는 것이 다 허무하고 시들시들할 수밖에 없고,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모르고 살면 누구나 다 이렇습니다. 모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을 먹고 생기있게 살게되기를 비는 오늘 아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생명의 빵’이 되려면 : 이웃을 하느님처럼!
사람이 창조자의 삶을 살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자면 반드시 ‘생명의 빵’이 되어야만 합니다. 생명이 빵이 되는 것이 창조자의 삶이고 남의 생명을 먹는 삶이 피조물의 삶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은 창조자로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지 몸소 생명의 빵이 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어제는 생명의 빵이 되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대상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셨다’라는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나에게 보내주신 이를 대하는 방식이 곧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나에게 맡겨지는 이는 이미 주님께서 나에게 그 사람을 보내주시기 위해 낳으시고 기르시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는 이미 그 사람을 보내주신 분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렇게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을 보낸 이를 대하는 방식과 같아집니다.
이옥란(67세) 씨에게는 여섯 살 유치원생 윤하라고 하는 유치원 딸이 있습니다. 폐지를 주워 팔고 쪽방촌에서 사는데 윤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닙니다. 윤하는 엄마가 리어커에 자신을 태우고 가도 밝고 똑똑한 아이입니다. 할머니라 불리는 엄마를 너무나 따릅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이옥란 씨는 가끔 한 건물을 기웃거립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보자 급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피합니다. 이옥란 씨가 가끔 찾아가 멀리서 얼굴만 바라보는 사람은 45세 민지원 씨입니다. 민지원 씨는 변호사로서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옥란 씨의 친딸은 민지원 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라고 하는 사람이 지원 씨를 찾아와 3천만 원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원 씨는 3천만 원이 애들 장난이냐며 돌아섭니다. 그러자 이옥란 씨는 그 어머니를 찾아가 통장을 주며 어려움이 있으면 지원이보다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통장을 받은 엄마는 지원이는 자기 딸이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이옥란 씨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죄인입니다.
멀리서만 딸을 지켜보던 이옥란 씨는 자신도 모르게 지원 씨에게 다가갔고 급기야 자신이 친엄마라 고백합니다. 딸은 매우 화를 내며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느냐며 매몰차게 친엄마를 몰아세우고는 떠납니다.
이옥란 씨가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제작진은 민지원 씨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아프다고 합니다. 민지원 씨는 엄마가 있는 쪽방촌에 처음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손녀딸로 보이는 윤하를 보고는 또 화가 치밉니다. 자기는 남의 집에 버려놓고 결혼해서 손녀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가 가증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윤하는 딸도 손녀딸도 아닙니다. 쪽방촌 이웃인 술집 여자가 맡겨놓고 나중에 찾으러 온다고 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이옥란 씨는 스물두 살 때 아기를 갖습니다. 남자는 도망쳤습니다. 친정에서 쫓겨나서 어린 나이에 아기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았던 시골 마을 제일 큰 부잣집에 아기를 몰래 놓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 집엔 아이가 없었고 덕분이 하늘이 내려준 딸이라 믿고 지원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잘 키웠습니다.
옥란 씨는 서울로 올라와 일하며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죽겠다는 심정으로 굳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비록 쪽방촌에 살지만, 윤하를 남부럽지 않은 비싼 유치원에 보내고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는 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지원 씨는 윤하를 보며 엄마가 지금까지 자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버린 죄책감을 버려진 윤하를 통해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지원 씨는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부모가 아이를 낳자 구박 덩이로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문에 갖은 궂은일을 다 해야 했습니다. 양어머니는 시험 전날에도 일부러 아이에게 일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지원 씨는 우연히 옆집 어른들에게 자신이 친딸이 아님을 듣게 되었고 지원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독립하여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자기를 키워준 부모의 가세는 기울었고 이제는 지원 씨에게 와서 돈을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지원 씨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키운 어머니 중 누구를 택할까요? 지원 씨의 선택은 친엄마입니다. 친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버린 경험이 있기에 버려진 아이를 대하는 모습이 곧 자기 친딸을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지원 씨를 키워준 엄마는 지원 씨를 버려진 아이를 자기가 키워준다는 생각으로 키웠습니다. 이런 마음 안에는 그 버린 어머니에 관한 판단이 들어있습니다. 지원 씨의 친엄마를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지원 씨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오열하는 모습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얼마나 먹고 싶은 밥이었을까요? 지원 씨의 친어머니는 윤하를 대하는 모습으로 지원 씨를 어떻게 대했을 것인지를 지원 씨가 믿게 했습니다. 이옥란 씨는 딸을 버렸지만 진정으로 생명의 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카오 TV ‘모큐멘터리 진짜 사랑 5’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여기에 달린 댓글 중 하나입니다.
“지원 씨 양부모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마세요. 그들은 지원 씨한테 부모 역할을 제대로 안 했어요.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고 적어도 집안일 다 시키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나중에 돈도 안 뜯어가고요. 어차피 고등학교까지만 살고 나와 혼자 알바하며 이 악물고 공부한 건데 양부모가 왜 지원 씨한테 돈을 요구하나요? 앞으로는 절대 아무것도 해 주지 마세요. 고마운 사람들 아닙니다. 지원 씨와 윤아 그리고 어머니,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이 댓글에 많은 동감을 표시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에게 주이진 이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내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을 좋지 않게 대해서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이들이 귀찮은 존재라면 나는 그 사람을 보내신 주님을 귀찮은 존재라 여기는 것입니다. 지원 씨의 양부모는 지원 씨를 처음엔 하늘이 보내주었다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지원이를 키우며 그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됩니다. 그러면 모기로 심판받게 됩니다.
교회에 맡겨진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 교회에 머물 수 있도록 이미 교육하시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마치 교회가 대신 키워주는 것처럼 여겨서는 교회가 그들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며 나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하느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신자들을 하느님처럼 대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될 수 없고 그러면 나중에 하느님도 고마움보다는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 나에게 오는 이들을 그 보내주신 하느님처럼 보려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해 보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분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하겠습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떤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형제님께 “형제님 월급으로 세 아이 공부시키는 것이 만만치가 않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하겠습니까?”
아이 키우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키우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이 키우는데 기쁨만 있을까요?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있고, 기쁨보다 더 많은 힘듦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작은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이익을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기쁨으로도, 자그마한 사랑으로도, 자그마한 만족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오지 않을 큰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이 빵은 세상의 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주는 세상의 빵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그런데 이를 이 세상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삶의 순간순간에서 느끼는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로,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만나를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거 조상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을 얻었던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은총을 얻게 된 것일까요?
커다란 은총이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느끼고, 또 그 주님과 함께하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적다고, 아니 없다고 말하며 힘든 삶이라면서 한숨을 내쉬고 눈물짓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상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있으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에게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다.
- 구병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 6, 51)
한 번도 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우리들 시간이다. 빵이 되지 못한 삶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삶이다. 모든 사랑은 생명의 빵에서 시작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소식은 다름아닌 생명의 빵 사랑의 빵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아래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계속하여 높이높이 올라간다.
내려오지 않고서는 우리를 끌어안을 수 없고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없다. 온 삶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이다. 내려오신 생명의 빵은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생명의 빵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신다. 생명의 빵은 삶의 맛을 느끼게 하신다.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일생이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오늘의 빵이 되신다.
빵의 따뜻한 맥박 소리를 듣는다. 십자가의 상처처럼 손가락으로 찔러 보아도 먼저 당신을 열어 보이신다. 사랑하기에 상처가 있고 사랑하기에 상처도 축복이 되고 은총이 된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되게하시는 생명의 빵이시다. 우리또한 사랑하는 사랑의 빵이 되게 하시는 생명의 빵이시다.
빵의 고향이 하늘 나라이다. 오늘은 짧고 사랑은 영원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생명의 빵으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빵이 되신다. 우리도 빵이 되어야 할 사랑의 오늘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5월 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8 |
---|---|
22년 5월 7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7 |
22년 5월 6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6 |
22년 5월 4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4 |
22년 5월 3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3 |
22년 5월 2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2 |
22년 5월 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