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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2022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리따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고, 야포로 가서 병들어 죽은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립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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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6장 60ㄴ-69절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손우성 미카엘 신부 집전
2022년 5월 7일 (토)
손우성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7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리따와 야포라는 도시에서 베드로가 일으킨 두 가지 기적을 들려줍니다. 리따에서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고쳐 준 것과 야포에서 선행과 자선을 많이 베풀고 세상을 떠난 도르카스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베드로의 기적을 통하여 그곳에 사는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단순히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섰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맥상 ‘믿는다’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 말 동사는 분명히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동사가 ‘믿다’ 또는 ‘회개하다’라는 행위의 결론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사도 3,19; 26,20];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11,21]). 게다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의 복음 선포 활동의 목적이 바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런데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 이미 그분께 돌아섰던 많은 이가 오늘 복음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주님에게서 떠납니다. 그분의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고,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믿고 회개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 믿음이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거나,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여겨질 때 우리가 보이는 행동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가슴에 새기며, 단순히 머리로 믿는 것을 뛰어넘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쓸모없는 살덩어리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쓰십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옛날에 영지주의자나 이원론의 이단들처럼 육을 죄악시하는 그런 뜻일까요?
옛날에 삼구(三仇) 교리가 있었습니다.
삼구란 석 삼에 원수 구이니 세가지 원수라는 말인데 마귀, 세속, 육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왜 원수입니까? 그 자체로 악하기 때문이고 육신도 그 자체로 악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육신이나 세상을 악으로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속, 육신, 마귀가 원수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을 경우만 원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부모가 막으면 그때 부모가 원수인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부모인데 부모가 우리의 원수일 리는 없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경우, 자기가 복음 말씀대로 사는 것을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반대하자 주교님 앞에서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 때 그것을 막을 경우 원수인 겁니다.
오늘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하는데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음은 물론 거북하다며 당신을 떠나는 것을 보고 나머지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냐며, 너희도 떠나겠냐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당신이 전에 있던 곳 곧 아버지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냐며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늘로 올라갈 때 이 세상은 떠나야 하고, 하느님께 갈 때 우리 육신은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지요.
죽어 우리 육신이 부활할 때 지금 이 육, 그러니까 이 살덩어리를 그대로 가져가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이 살은 썩어야 하지요.
오늘 주님께서 쓸모없다고 할 때의 육은 몸(body)이 아니라 살(flesh)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육신은 살이 아니라 몸을 말하고, 이 세상의 육신은 지금 이 살을 지니고 있지만 부활한 뒤의 육신은 분명 지금의 이 살을 지니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몸이 건강하기 위해 살을 빼야 한다면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이 살덩어리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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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등학교 2년 동안 짝으로 매우 친한 동창이 있습니다. 마음도 잘 맞았고, 재미있는 시간도 함께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고, 이 친구는 유학을 다녀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는 장소도 달라서, 저는 강화에 그리고 친구는 강원도 원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기는 하지만,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친구와는 만날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신학생 때에도 자주 만났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렇게 친했었던 의사 친구보다 이 친구와 더 친해졌습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시간이 많이 남으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 않은 관계가 나중에 저절로 가까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자주 봐야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게 되면 아예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계속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많은 이가 예수님의 말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떠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분명히 계속 보았을 텐데도, 자기 뜻과 다르다는 판단 아래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만나야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떠날 생각만 하면, 떠나야 할 이유만을 찾으면서 믿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세속적인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주님을 떠나고 싶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 존 드라이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5월은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약속의 달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너무 많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 은총의 오늘이다.
너무도 빨리 첫마음을 떠나고 있다. 번번이 떠나가는 우리들 마음이다. 아직도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배신의 분열된 자아를 빠져나오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하느님의 허락과 섭리 사이에 우리가 있다. 맹세할 것 하나도 없는 허약한 우리들 삶이다. 이렇듯 떠남은 빠르고 견딤은 더디다.
십자가의 뜨거운 상처를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더 작고 더 낮아지지 않고서는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떠나야 할 우리들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우리들 신앙이다. 사람만 있고 마음이 없다면 아픈 관계이다. 마음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을 치유하신다. 주님을 다시 향하는 믿음의 눈물이다. 아카시아 꽃향기 다시 내려앉는다. 허락한 은총을 만나는 은총 가득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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