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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간 월요일 -
2022년 5월 9일 (월)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었다고 따지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무아경 속에서 본 환시를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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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10장 1-10절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손우성 미카엘 신부 집전
2022년 5월 9일 (월)
손우성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9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계시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이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양들이 이 안전하고 확실한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둑과 강도가 바로 그들입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도둑과 강도,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양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부류의 등장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또 다른 인물이 복음에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지기입니다.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사라지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문지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착한 목자에게 양 우리의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이 목자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가 바로 문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문지기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가 바로 문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신자들이 올바른 방향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문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께 호감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며,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찬미하며, 오늘 하루 주위의 이웃들을 그 문으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충실한 문지기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와 다르다고 혐오하는 나는 아닌지.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며칠 전 저희 식당에 이슬람 신자인 외국인이 처음으로 와서는 자기는 고기를 먹지 않으니 비빔밥에 고기를 빼고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슬람은 금하는 음식이 있고 그래서 '허락된 것'이라는 뜻의 할랄 식품이 있지요.
유대교에서도 금하는 식품과 먹어도 되는 음식이 지금도 있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음을 우리는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 이미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물론 이 말씀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시비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아무튼,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밖의 것은 더럽거나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거나 더럽힌다는 것이며,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곧 사람의 밖의 것 곧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아무것도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문화와 비교해서 얘기하면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개고기를 먹는 문화였는데 요즘은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하는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한때 프랑스 모 배우가 우리가 개고기 먹는 것을 자기 문화를 중심으로 비난한 것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처사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개를 반려견으로 키울 정도로 개를 끔찍이 사랑하기에 누가 개를 먹는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개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는 것으로 발전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개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학대하는 것은 사랑에 반하는 것이니 그러지 말자고 생명 사랑 운동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다른 고기는 다 먹으면서 그리고 생명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예를 들어, 매일 커피를 일회용 컵과 빨대로 먹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개를 왜 먹느냐고 하며 남을 혐오하는 것은 생명 사랑이 아니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요즘 개를 반려견이라고 하며 키우는데 제가 볼 때 그분들이 정말 개를 사랑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제 생각에 개를 정말 사랑한다면 개를 집 안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줘 맘껏 뛰어놀고 흙을 밟게 해줄 것입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자식을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가 좋다는 식으로 이것저것 요구를 너무 많이 하여 자식을 버려놓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볼 때 요즘 개를 키우는 사람도 자기식으로 개를 사랑하고 키웁니다. 그것을 뜯어 보면 자기애(自己愛)에 불과합니다.
저는 대전에 있을 때 동식물 축복식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축일에 개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 식물까지 축복해줬습니다. 다만 뱀은 제가 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니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뱀은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하느님 창조물이니 혐오해서는 안 되는 동물이고, 뱀을 애완 동물이랄까 반려 동물로 키우는 사람을 혐오해서는 더더욱 안 되겠지요.
나와 다르다고 혐오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기적 편향 내려놓기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 분담 문제로 부부 싸움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가사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고, 남편은 나름 많이 가사 일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서로 자신의 가사 분담이 크다면서 다툽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는 과장되게 말하고, 불리한 부분은 무시해버립니다. 자기중심적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자신이 쏟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패하면 날씨나 심판의 편파적인 경기 운영 같은 다른 요인으로 탓을 돌립니다. 운전하는 사람도 대부분 자신이 운전을 능숙하게 하고 미숙하게 운전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운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권력까지 드러냈던 사람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은 “이 위선자야~”였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겸손의 모범을 갖추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 자신의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만 생각하는 착한 목자였고, 종교 지도자들은 양들의 안녕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탐욕에만 골몰하는 가짜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무조건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산신이 흩어집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이기적 편향’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모두가 낯설게만 들릴 수밖에 없었고, 주님의 곁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양들의 문이신 주님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양의 우리가 되어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주실 뿐 아니라, 목자로서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들도 불러들이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당신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 11,18) .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과 속에 들어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
- 켄 키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 10,7)
양들의 문(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자유롭게 드나드는 양들과 목자의 관계가 밀려드는 충만한 복음의 관계이다. 모든 관계는 문(門)에서 시작된다. 문(門)은 소통이며 신뢰이며 사랑이다. 문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사랑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문이다. 문이 있기에 지치지 않고 다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간 길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다. 십자가의 문 광야의 문 풍랑의 문 말씀의 문 빵의 문이 있었다. 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그래서 문이란 우리들에게 삶다운 삶을 일깨워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시다.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오늘도 문을 드나드는 우리들이다. 누군가의 문과 문이 되는 삶이 빛과 소금의 삶이다. 빛과 소금은 열린 문같이 열린 살아있는 만남이다. 살아있기에 드나드는 문이 있는 것이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문을 드나들며 사랑을 배운다.
우리에게는 들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문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오늘을 가득 채운다. 문이 열리자 모든 시간은 은총으로 출렁인다. 문이 되시고 길이 되시는 주님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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