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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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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간 수요일 -

 

 

2022년 5월 11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성령께서는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시어, 키프로스로 건너가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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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2장 44-50절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기석 비오 신부 집전

 

 

2022년 5월 11일 (수)
최기석 비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혼동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만납니다. 교회가 성화 상 공경과 관련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 저 뒤편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성화 상 공경은 성모상이나 성인의 이콘을 공경하고 신성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형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곧 성모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 다시 말해 그들의 신앙이 보여 준 모범적인 삶에 대한 공경의 행위입니다. 이는 교회가 거행하는 성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질료와 형상인 빵과 포도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을 안겨 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보고 굳게 믿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인 배후를 볼줄 아는 믿음의 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퍼득 떠오른 말이 바로 배후와 혐의입니다. 배후란 벌어진 어떤 일을 보고 그 일이 그 사람이 한 것이라기엔 너무 큰일거나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때 곧 혐의가 있을 때 그 사람 뒤에 있다고 생각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혐의가 있을 때 유능한 수사관은 그 배후를 캐냅니다. 그런데 배후를 캐내는 것은 의심스러운 안 좋은 일뿐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경우 영적인 면에서도 그 배후를 캐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일의 <영적인 배후>를 캐는 것인데 꽃이 피면 그 꽃의 배후에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꽃의 아름다움에서 그 배후의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얘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암흑세계의 지배자인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피조물을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더더욱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영적 배후인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렇게 보는 데 실패하고 다른 피조물은 그 배후의 하느님을 보면서도 인간은 그렇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내게 파견한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낸 인간이 아니라 어떻게 뚝 떨어져 내 앞에 있게 된 인간, 꼴보기 싫은 인간, 장점은 하나도 없고 단점만 보이는 인간, 죄만 보이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배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도 그렇게 보는데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믿지 않아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둠속에 있기에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배후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뒤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일컬어 혜안(慧眼) 곧 지혜의 눈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제3의 눈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뒤의 것이 아니라 배후의 하느님을 볼줄 아는 눈을 믿음의 눈 또는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보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보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고 싶지 않으면 꼭 만나야 할 사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이 곧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은 곧 빛입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빛을 보고 오징어만 그 배로 접근하여 올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찾아 올라오는 이들은 구원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귀를 막습니다. 구원의 길은 좁고 그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줄 이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는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하였고 지금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과 타협한다면 세상에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며칠 전 검찰이 결국엔 이은해와 내연남 조현수 씨를 살인·살인미수·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미수 혐의로 구속기소를 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수영할 줄 모르는 윤 씨에게 4m 높이의 바위에서 3m 깊이의 계곡물로 구조장비 없이 뛰어들게 해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윤 씨가 여러 차례 거절하자 “그럼 차라리 내가 뛰겠다”라며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아 살해했을 때 적용하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직접 살해한 상황에 해당하는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한 것입니다.

검찰은 또 공소장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윤 씨를 상대로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적시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앞서 2019년 2월과 5월에도 복어 피 등을 섞은 음식을 먹이거나 낚시터 물에 빠뜨려 윤 씨를 살해하려 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여러 차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기를 피폐하게 만드는데도 윤 씨는 이 씨와 그의 친구들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사건 발생 8년 전인 2011년쯤부터 남편 윤 씨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당시부터 윤 씨의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2017년 3월 윤 씨와 결혼하여 다른 남성들과 사귀면서 윤 씨를 착취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윤 씨는 6천만 원 상당 연봉을 받던 대기업 직원이었으나 이 씨와 결혼한 뒤로 개인회생을 신청했습니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불법 장기매매를 하겠다’라는 글까지 올릴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 직장 동료에게 3천 원을 빌려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사망 당시 윤 씨 자취방에 있던 서류들을 보면 빚만 1억5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윤 씨는 결혼 2년 차인 2018년 12월에 이 씨와 통화하면서 “빚이 너무 많아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그만할까. 지친다”라며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 씨가 “정말 그만 만나고 싶냐?”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씨는 윤 씨에게 “이해한다”라며 공감한다는 식으로 답하면서 심리적 지배를 이어갔습니다. 윤 씨는 숨지기 5개월 전인 2019년 1월에 조 씨에게 문자를 보내 “은해에게 쓰레기란 말 안 듣고 싶다. 은해가 짜증 내고 욕할까 봐 무섭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윤 씨는 결국 2019년 6월 30일 오후 8시 24분 경기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이 세상에 이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짓은 더하면 더했지 이은해 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물로 빠뜨립니다. 

윤 씨가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이 씨와 조 씨로부터 탈출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이 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누군가를 만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교회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삼구, 그리고 그 욕망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세상이 사탄 무리의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탈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2013년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오블리비언’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블리비언은 ‘(기억의) 망각’이란 뜻입니다. 잭 하퍼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지구에 남아 있는 외계인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외계인들에게 잡혀 정보를 빼앗기면 안 되기에 그 사람의 기억을 일부러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아내를 만나게 되어 기억을 되찾습니다. 아내는 잭 하퍼가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서 기억이 지워져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결국 그가 죽이고 있었던 것인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잭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외계인들을 물리칩니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성경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아내를 만납니다. 교회는 세상이 적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아 세상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승리한 자만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뱀으로 보이고 세상이 사탄의 집으로 보이게 해 주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자신에게 절하면 자신이 가진 세상의 영화를 예수님께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빛을 보려면 자신이 어둠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바라볼 수 있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어둠에 속해있음을 보게 하는 이를 먼저 꼭 파견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편이 발코니에서 저를 밀었어요.

 

어느 병원 응급실에 한 여자가 실려 왔습니다. 아파트 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얼굴을 심각하게 다쳤고 전신에 부서지지 않은 뼈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습니다. 그 병원의 모든 외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수술을 맡았지요. 자살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모든 의사가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의사 중 한 명은 이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겠다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와 자원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지만, 이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여인이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어떤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남편이 발코니에서 저를 밀었어요.” 
 
그녀의 말에 남편은 체포되었고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앞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의사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에 앞서 자신이 할 일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은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지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은 세속적인 통치자, 모든 나라를 다스릴 유다인의 왕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고,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는 약한 모습만 보이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특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 뿐 아니라 모든 나라 백성이 들어간다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던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빛이신 주님을 믿고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며,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지레짐작과 같이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얻은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주는 것으로 삶을 만들어간다.

- 윈스턴 처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요한 12,50)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를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묻는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시작하여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을 실천으로 옮기는 생명의 가치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가장 존엄한 명령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다운 삶에 우리가 눈을 뜨는 기쁨이다. 생명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믿음의 여정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 생명의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예수님께서는 일상생활과 신앙적 삶이 생명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혼돈과 모든 무질서는 생명의 무지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이다. 영원한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생명이다. 생명이 참빛임을 가르쳐주시는 생명의 명령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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