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3.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

 

 

2022년 5월 13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고, 사도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4장 1-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기석 비오 신부 집전

 

 

2022년 5월 13일 (금)
최기석 비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어지럽고 어수선한 상태를 ‘산란하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걱정과 근심을 안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산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그의 동생들과 지인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도 다시 한번 산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 산란한 마음을 다잡으시고 다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근심과 걱정을 아버지 하느님께 내어 맡기신 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어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가 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 곧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하느님을 믿고, 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며, 흩어지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오늘 하루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하여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있을 곳은 어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재의 거처가 아니라 미래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은 나의 거처, 곧 내 머물 곳이 어딘지 생각해볼 것입니다. 진정 내 머물 곳은 어디입니까? 어디여야 하고 죽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미래 거처는 죽기 전의 거처가 아니라 죽고 난 뒤의 거처인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골로 간다고도 하고, 혼비백산한다고도 하였지요. 

골로 간다는 말은 그리 좋은 뜻이 아니지요. 골로 간다는 말의 유래와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골이 관의 옛말이라는 설이 맞다면 우리의 미래 거처가 관이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혼비백산도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백은 흩어진다는 뜻이니 우리의 미래 거처가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고 혼비백산하기 전까지 100년은 묘지가 우리의 거처가 되고 그 이후에는 거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죽고 난 뒤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말도 있는데 그러니까 죽고 난 뒤 우리 조상들의 미래 거처는 그 어떤 것이건 하나같이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죽으면 명부 곧 Hades에 간다고 믿었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오늘 아버지의 집에 거처가 많고,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 가신다는 말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머물 곳으로 아버지의 집을 제시하시며 그 자리를 준비하러 먼저 가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골로 가거나 혼비백산하거나 구천을 떠도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할 터인데 지금 즉시 주님을 따라 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하시면 어떨까요? 

좋을까요? 기쁠까요? 망설여질까요? 좋거나 기쁘지 않다면 아버지 계신 곳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 지금 있는 이곳이 더 좋고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그런 것일 겁니다.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시무룩하여 떠난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지금은 이럴지라도 우리 신앙이 깊어지고 하느님 사랑이 커져 언젠가는 진정한 부활을 우리가 희망하며 살아야 할 것이고, 위령 미사 감사송처럼 영원한 거처에 대한 찬미가를 읊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의 흐르는 본성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질서가 반드시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문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처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거처가 곧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신비를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정리해주십니다. ‘길’은 통로입니다. 모세가 곧 하느님께 머무는 통로가 되어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을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은총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자기 봉헌입니다. 항상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생명이시기에 당신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에게만 오십니다. 하느님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는 자신을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 때 내려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인임을 자처하려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자기 봉헌이고 제사이고 기도입니다. 미사 때 이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셔도 그분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생명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 사람이 생명의 주인을 자신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창조자로 두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 덕분으로 자신이 산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믿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의 돈을 빼앗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와 관계가 좋다면 생명까지 주신 원천이 옆에 있기에 굳이 타인의 것에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EBS 육아학교’에서 ‘물건 뺏는 첫째, 뺏기고 우는 동생’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민이는 언니이고 지윤이는 동생인 자매입니다. 처음에 지민이는 동생이 생겼을 때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이가 기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지민이는 지윤이의 모든 물건을 다 빼앗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합니다. 엄마는 ‘둘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첫째가 질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유아 전문가 선생은 엄마가 두 자매와 노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민이는 지윤이가 가지고 노는 것을 다 빼앗았고, 엄마는 지윤이에게 욕심 많은 언니에게 지윤이가 양보하도록 합니다. 지금 이것은 엄마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지민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윤이를 어른 취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선생은 엄마에게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지민이를 언니로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지윤이에게 양보하게 가르치면 언니는 영원히 욕심쟁이로 남습니다. 지민이는 장난감을 빼앗긴 지윤이에게 심지어 엄마가 듣는데도 “너네 엄마 저기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윤이는 이런 지민이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흐르는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를 빨립니다. 

만약 지민이를 포기하고 지윤이에게 더 사랑을 주면 지윤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고마워할까요?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민이가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윤이를 위한 공간을 언니가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모두에게 흐를 수 있습니다. 언니를 그렇게 외면한 엄마가 언젠가 자신도 외면하게 될 것이라 여겨 지윤이도 결국 엄마가 주는 사랑의 부담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있다고 믿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지민이가 아닌 동생 지윤이에게 더 있다고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깨집니다. 먼저 지민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윤이에게 엄마에게로 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은표 씨 가족 지웅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정은표 씨는 김하얀 씨와 테니스를 칩니다. 그리고 지웅이에게 동생을 마중 나가라고 시킵니다. 지웅이는 아빠 미소로 동생을 돌봅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중3 아이가 남동생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잘한 것입니다. 지웅이를 동생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생은 형 지웅이를 통해 부모에게 올 수 있고 지웅이는 부모에게 가기 위해 동생을 보살핍니다. 

아마 정은표 씨에게는 자녀들보다 아내일 것입니다. 아내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남편에게 먼저 가야 함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이 가족은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잘 아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처럼 삽니다. 

민수기에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르얌이 모세에게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은 하느님이 동생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하여도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셋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에는 질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이 물러가자 미르얌의 피부에 나병과 같은 병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론은 미르얌을 위해 모세에게 중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미르얌의 병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사랑에 질서를 잡아주시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를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주님께 은총을 청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길로 지정해 준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은총보다 오히려 안 좋은 것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셨는데, 그 교회를 무시하고 직접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흐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지난 3월, 사순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 강의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2년간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강의 일정을 잡아놓고도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강의 부탁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를 필요로 한다는 말에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사는 신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신부와 함께 차를 타기도 했고, 식사도 같이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약간의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하고 하루 동안 방안에서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걱정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강의는 어쩌지? 성지 미사는 어떻게 하지? 또 안치 예식은 누가 하지? 혹시 직원들도 확진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때,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제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미사와 안치 예식을 부탁할 신부도 충분히 있었고, 강의는 몇 주 미루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음성 판정을 받아서 모든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점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만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주님은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재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인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많은 걱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걱정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비누는 쓸수록 물에 녹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때를 씻어준다. 물에 녹지 않는 비누는 결코 좋은 비누가 아니다.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고 몸만 사리는 사람은 녹지 않는 비누와 마찬가지로 나쁘다.

- 존 워너메이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오월의 자리 오월의 집에는 아름다운 생명으로 가득하다.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오늘 우리가 다시 만난다. 길도 진리도 생명도 모두 하느님을 향해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에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길도 진리도 생명도 뜨겁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오월이 된다. 잡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생명의 길이다. 인생이라는 길들을 통해 새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알게 된다.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사랑의 진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예수님같이 나누고 또 나누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삶을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통해서만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새롭고도 참된 길이다. 거처할 사랑의 집을 위해 사랑의 진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다. 

참된 사랑이란 하느님과 함께 서로를 위해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알게 하는 나눔이다. 나눔을 안겨드리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예수님같이 나눔이 길이고 나눔이 진리이며 나눔이 생명이다. 

오늘도 나누어지고 쪼개어지고 부서지는 생명의 빵이시다. 나누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턱이 없다. 나누지 않고서는 갈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나눔과 산란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