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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5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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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5주일 -

 

 

2022년 5월 15일 부활 제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고 안티오키아로 갑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어좌에 앉으신 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5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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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3장 31-33ㄱ절, 34-35절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방에서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 집전

 

 

2022년 5월 15일 (일)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2년 5월 15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서로’라는 낱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를 삶에서 실천하도록 계명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교의 계명은 “사랑하여라!”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목적어가 구약과 신약이 조금씩 다르고, 또 신약에서도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이 서로 다릅니다.

먼저, 구약에서는 대표적인 목적어가 “주 하느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 6,5)

공관 복음을 보면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명에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발견되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덧붙여 ‘사랑하여라!’는 계명의 목적어를 이중으로, 곧 하느님과 이웃으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주신 새롭고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여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요한 복음 15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15,12.17)

따라서 적어도 요한 복음에서 ‘사랑하여라!’는 계명의 목적어가 분명히 하느님에게서 사람에게 옮겨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한쪽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간의 사랑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단 하나의 계명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은 ‘서로’라는 낱말에 주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첫째 편지가 들려주는 다음의 말씀도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 4,12)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새로운 사랑법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고 하시며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주님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살던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기는 했고, 주님의 새 계명을 모르는 사람도 서로 사랑하기는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너희는 율법에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원수가 아닌 사람끼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합니다. 문제는 주님의 새 계명을 배우기 전에는 원수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방인들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해준다는 주님 말씀처럼 나한테 잘해줘야만 원수가 안 되는데 대댜수가 나한테 잘해주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도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받을 생각으로 사랑을 했는데 많은 경우 되받지 못하거나 원하는만큼 되받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원수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는데 한마디로 서로 바라는 사랑을 했기에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바라는 사랑,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에 머물거나 받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사랑을 하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을 살고자 하는 우리는 "너희는 이웃에게 등대지 말고 하느님께 바라라"는 말씀처럼 인간에게 등을 기대면 그 사랑은 이웃 때문에 무너질 것이니 바라기는 하늘 바라기를 할 것이고, 하기는 내리 사랑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바라고 이웃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때 원수가 없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원수였던 사람까지 이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사랑에 따라 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고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고도 하는데 신천지는 죽어서 가는 곳이거나 다른 어디가 아니고, 지금, 여기 주님의 사랑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부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부러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요한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계명을 받은 오늘 우리는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조선족 동포 공동체와 함께 성모의 밤과 피정을 하기 위해 홍천 '여기 피정의 집'에 와 있는 바람에 묵상을 충분히 못하고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냥 사랑하면 되는데, 왜 굳이 예수님 말씀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도 역시 요한복음이 성찬례를 제정하신 성목요일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란 계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 계명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꼭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선 사랑은 왜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행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소유하는 행복과 사랑하는 행복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행복은 허무하게 빨리 끝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얻는 행복은 오래갑니다. 

워런 버핏은 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유하는 목적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한 연구에서 ‘행복은 관계’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그 관계 안에 소속되는 기쁨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관계가 해소해주는 인간의 욕망은 ‘소속감’입니다. 이 소속감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하리 핼로우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원숭이는 젖을 주는 어미보다 따듯한 어미를 선택했습니다. 젖은 짧은 행복을 주지만, 따듯한 어미는 소속감을 줍니다. 그 소속감이 자신을 더 오래 생존시켜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를 맺으려면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 안엔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명령을 따르며 그 공동체에 속해있습니다. 가정보다는 사회가 그 사랑의 정도가 약하겠고, 사회보다는 교도소가 더 약할 것입니다. 물론 교도소보다는 동물의 무리가 사랑의 정도가 더 역합니다. 우리 각자는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명령은 언제나 ‘피조물의 수준’의 사랑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라 믿으며 사랑하라고 하면 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사람의 수준만큼밖에 사랑하지 못합니다. 

박수홍 씨는 현재 형과 100억 가까이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된 데에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박수홍 씨에게 가족을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박수홍 씨에게 가족 사랑을 강조했지만 그건 실제로 박수홍 씨의 결혼까지도 반대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박수홍 씨는 가족의 반대가 자기 팔 한쪽을 끊어내는 고통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여 가족 안에서의 소속감을 느끼던지,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그 사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박수홍 씨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해 준 카레가 맛있다고 했다가 어머니가 일주일 내내 카레를 해 주어서 투정을 부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돈 번다고 유세하느냐며 3일을 단식투쟁하였고 결국엔 박수홍 씨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소속감을 담보로 어쩌면 자녀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보니 ‘딸 같은 며느리 원하는 박수홍 엄마에게 돌직구 날려버린 박명수’란 제목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독립시켜 잘 살게 하는 목적으로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박수홍 씨 어머니는 아들이 딸처럼 자신에게 잘해주는 며느리를 아들을 통해 얻고 싶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어머니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며느리를 원했고, 딸처럼 딸이 없는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박명수 씨는 딸 같은 며느리는 만들 수 없다고 못을 박으니 거기 나온 어머니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습니다. 이상민 씨의 어머니는 “아니야, 그렇게 만들어야 해!”라며 단호하게 말했고, 다른 사람은 안 돼도 나는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하는 박명수 씨에게 “지금은 시엄마들이 잘하면 따라오게 돼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속하려면 자신의 사랑의 수준까지는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하는 사랑이 진정 사랑일까요? 인간도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 사랑 안에는 반드시 피조물의 생존욕구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명령을 따르다가는 피를 빨립니다. 같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인간의 명령을 따를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이제 사람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봐야 사람의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공동체 안에 갇힐 뿐입니다. 다 자신처럼 만들려고 하는 명령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본성은 창조자만이 지닌 특권입니다. 창조자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창조자로 만들려는 것이고, 인간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자신처럼 만들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처럼 됩니다. 그래야 하느님 가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누구나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면 그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그 명령하는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안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의도가 명령보다 큽니다. 누군가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명령하는 사람의 의도에 사로잡힙니다. 의도는 욕구입니다. 욕구는 본성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모든 명령은 다 누군가를 나의 욕구를 채우거나 나의 욕구대로 만들려는 틀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밀링거 대추교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제들을 서품하고 자신만의 교구를 만들고 가톨릭 주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문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성 마리아란 여인과 통일교식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파하는 주교로 살았습니다. 여러 사제가 밀링거에 의해 주교와 사제로 서품되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밀링거 대주교가 사랑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명령안에는 ‘나처럼’이 들어있습니다. 결국 밀링거를 통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더라도 밀링거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는 이가 사랑하라는 말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하고 되고 그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늑대가 인간 아기에게 명령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모든 명령을 다 따라도 아기는 늑대처럼만 됩니다. 늑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늑대의 본성에 한정됩니다. 인간이 사랑하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본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분처럼 사랑해야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친구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하느님으로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자기 본성만큼 사랑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고 사랑하려면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얘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길을 가다가 주인 잃은 지갑을 주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다음의 보기에서 선택해보세요. 
 

1) 가까운 경찰서나 경비실에 맡긴다. 
 
2) 모른 척 그냥 간다. 
 
3) 지갑 속 현금 액수에 따라 1번 또는 2번을 선택한다. 
 

아마 대부분 1번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1번을 선택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지갑을 주어 경비실에 맡겼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지갑 주인이 지갑 안에 130만 원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니 조사받으러 출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도둑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이 사람은 법정까지 가게 되면서 1,300만 원을 변호사비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이제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번이 정답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2번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곤란을 겪을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어쩌다 생겼던 단 한 번의 일을 기억하면서 선행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쩌면 선행을 하기 싫은 것이 아닐까요? 
 
손해를 보더라도 사랑 실천에 적극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여라.’를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하신 고별사 부분입니다. 당신의 떠남은 육신의 작별일 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널리 퍼지는 세상을 맞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말씀에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얘들아”(요한 13,33)라는 호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을 정겹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제자들이 더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작별하고 나면 지금 당장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없는 동안 주님과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사랑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사랑 실천에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드는 우리입니다. 사랑과 멀어질수록 주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를 이루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은총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겸손을 배우려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 O.메러디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요한 13, 34)

 

사람은 계명을 필요로 한다. 새 계명은 새로운 실천이다. 실천을 다시 새기는 새 계명이다. 새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참된 사랑이다. 생활의 중심에 있어야 할 새 계명 사랑이다. 이렇듯 참된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확장되는 참된 생명이다. 참된 생명 참된 사랑은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이끌며 삶을 바꾸며 인생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의 실천인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계명이 아니다. 새 계명인 사랑은 우리를 일상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사랑을 실천하신다. 실천이 흔들리면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게 된다. 우리의 생활은 욕망의 노예가 아닌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건강한 사랑의 참된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를 살리시는 새 계명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행복이다. 그릇된 욕망을 치유하는 새 계명이 우리를 새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랑에 감사하는 삶의 새 계명이다. 생활 속의 실천이 진정한 사랑임을 믿는다. 서로를 참으로 사랑하는 새 빛이 우리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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