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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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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2022년 5월 17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 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주님께 그들을 의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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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소서.

 

 

복음
요한 14장 27-31ㄱ절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한욱 요한 신부 집전

 

 

2022년 5월 17일 (화)
배한욱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어떤 평화를 바라시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평화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평화는 아마도 전쟁이나 갈등, 분쟁과 싸움이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가식적이고 꾸며진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넘쳐 나는데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떻게든 포장되고 가려진 문제 위에 세워진 평화는 우리를 기만합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평화라는 가식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는 아픔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얻은 평화가 아니라면 그 또한 거짓 평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평화를 바라시나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인가요? 아니면 세상이 주는 평화인가요? 권정생 작가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 속의 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운 세상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담담함의 평화와 든든함의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평화의 반대는 불안과 불화이고 그래서 평화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말 미사에서는 평화 대신 평안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는 평화라고 하는데 그들은 화평이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아무튼, 평화에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화평은 관계적 차원입니다. 

관계가 좋지 않고 갈등 관계이거나 싸움이나 전쟁 상태일 때 우리는 화평을 청하기도 하고 그래서 화해가 이뤄졌을 때 평화롭다고 하는데 이처럼 평화의 중요한 한 축은 관계의 화해가 이뤄진 상태로서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평화는 평화의 다른 한 축인 평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도 겁내지도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이 얘기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니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예견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곧 당신이 돌아가시고 당신을 죽게 한 사람들이 제자들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심란해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습니까? 

이런 경우 최악을 각오하면 곧 죽기를 각오하면 그런 상황이 와도 담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평화는 담담함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최악을 각오하는 것은 최고의 가난이기에 그러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순간 모든 것이 선이 되는 건 사실이기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각오하고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왔을 때 너 이제 왔냐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마음의 각오로 인한 평화가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평화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마음의 각오는 나 혼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이런 평화는 마음 수양을 통해 내가 이루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평화이고 그것은 주님께서 갔다가 다시 오심을 믿을 때 생기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평화를 준다고 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평화는 든든함의 평화요 믿음의 평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무엇보다도 든든하고 무서울 것이 없을 터이니 주님의 오심을 믿고 심란해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인간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께서 함께 계시니 무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모범 두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을 세상이 꼭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삶을 꼭 보여주어야 하신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을 교육하기를 원하십니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그런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했습니다.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이가 비뚜로 걷고 있다면 그건 엄마가 비뚜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는 그저 보고 따라 하며 배울 뿐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모범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 가르침이 모범을 넘을 수 없을까요? 모범에는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통해 흐릅니다.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합니다. 지시하는 사람에게는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 편해지자고 말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일본에서 취객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아무도 돕지 않으려 하자 우리나라 청년 이수현 씨가 뛰어들어 그를 구하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그렇게 선로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신분에 많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지식은 피와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그 사람을 닮고 싶게 만드는 사랑이 섞여서 오지 않으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진리와 은총이 항상 함께 와야 합니다. 은총이 피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제자 47명이 이미 의사가 되었거나 의대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톤즈는 시골이고 수단에서도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공부를 굉장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태석 신부가 의사의 모범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지 않고 말로만 의사가 되라고 했다면 몇 명이 그분의 말을 따랐을까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선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분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이 두 가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거의 필요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본받게 하고 싶어서 가르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법과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비난하고 순종하는 모습도 없다면, 자녀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고 말을 잘 따라줄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범도 없고 피 흘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말 안 듣는 자녀를 고치는 수많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고쳐질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런 자녀를 자신이 직접 혼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대에도 가능합니다. 신앙의 힘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습과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습니까?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에서 무조건 화를 내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막말하고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나옵니다. 게임머니로 부모 몰래 600만 원을 결재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부모와 누나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착해 보입니다. 이런 아이에게 손이 올라갈 만도 한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입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냥 죽겠다고도 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상해를 입혀 합의금으로 받아서 갚겠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학교다 나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착한 가족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부모가 돈 버느라 너무 바빠서 금쪽이는 할머니에게 키워졌습니다. 할머니도 금쪽이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줍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귀찮아합니다. 할머니를 쫓아내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자기를 탓하기도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사람은 모범을 보고 성장하지, 지시받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모범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주는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엄마입니다. 하지만 금쪽이에게는 할머니였습니다. 문제는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금쪽이는 할머니를 통해 윗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둘이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거의 전적으로 할머니에게 키워지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금쪽이가 어머니를 통해 윗사람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보고 배우도록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사제가 주교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신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기 말을 따라 달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신자들이 그 사제를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잘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그 중간에 총회장이나 간부들이 있다면 그 간부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나의 모범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것 안에서 모든 조직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서류 면접에 떨어지고 합격 통지서를 받은 이유

 

어느 수출입 회사에서 비서직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취업이 급했던 어느 청년도 공고를 보고서 이력서를 제출했지요. 그런데 서류 면접에 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비서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학도 잘하지 못하고, 이력서에는 온통 오타로 가득합니다. 이런 비서를 저희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서류만 보고 자신을 함부로 판단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와 욕설이 가득 담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습니다. 발송하려는 순간, 이렇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뛴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습니다. 이런 항의와 욕설의 메시지를 보고서 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보낼 리가 없고, 또 자신의 화도 풀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기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이 청년은 뜻밖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비서 일은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힘들겠지만, 열려 있는 마음을 보니 행정 부처에서 먼저 경력을 쌓으면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처음의 마음대로 복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여전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충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물리적인 힘일까요? 관계 개선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삶의 기쁨을 주는 주님의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주시면서 평화를 이뤄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폭력의 관계가 아닌 평화의 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자기희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마태 14, 27)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삶 평화이다. 평화는 지혜의 결집이며 평등과 화합의 가치를 끝까지 따르는 인간 존중의 참된 실천이다. 예수님의 존재방식이 평화이다. 모든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평화이다. 

주님의 길이 평화의 길이다. 평화는 우리의 욕심과 폭력을 생명으로 되돌려놓는다. 참된 생명은 고통이 아닌 치유와 해방을 추구한다. 생명의 참된 가치가 바로 평화이다. 믿음을 통한 가치의 탄생이 평화이다. 

평화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분열과 증오를 멈추게 하는 십자가의 평화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과 대립을 함께 하는 올바른 관계로 되돌려놓는다.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평화는 공동체를 희망한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평화를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실천 없는 평화는 무기력하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삶의 본질을 삶의 가치를 당신 삶으로 바꾸어 놓는 가장 좋은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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