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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2022년 5월 19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 1독서에서 베드로는 사도들과 원로들을 향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형제들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이 충만하도록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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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거룩한 은총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불행한 이들을 행복하게 하시니 몸소 저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한결같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복음
요한 1장 9-11절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한욱 요한 신부 집전
2022년 5월 19일 (목)
배한욱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9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그분 앞에 멈추기.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시려고 올리브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함께 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하고 말씀하신 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루카 22,41)에 혼자 가시어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기도하십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는 곳에는 ‘겟세마니 대성당’이 자리해 있고, 예수님의 당부에도 눈이 무겁게 감겨 제자들이 잠들어 버렸다는 곳은 ‘사도들의 동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 사도들의 동굴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성지 순례객이 아니어서 여유 있게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 나름대로 그렇게나마 실천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앉아 기도하던 제 눈에 한쪽 벽에 새겨진 작은 글씨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리스 말로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객 가운데 누군가가 동굴 한편에 새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잠들어 버린 제자들의 마음에, 아니 제자들처럼 여전히 잠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새기고자 하였던 그이의 마음에 제 마음도 가 닿았습니다.
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저 그분 앞에 앉아 있는 것만이 그분 안에,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많은 일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그분 앞에 멈추는 것! 그렇게 멈추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기쁨이 솟아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에 깃들이고 머물고 물을 긷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는, 아니, 저는 사랑 안에 머물라는 오늘 주님 말씀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잘못이랄까 어리석음을 범하곤 합니다.
하나는 사랑이 아닌 미움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이 아닌 인간의 사랑에 머무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하찮은 이유로 미워하고 그런 미움에 머물곤 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인데 그 작은 행위들이 일일이 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비록 그 분노와 미움이 크지 않을지라도 계속 작은 미움 안에 머무는 셈입니다.
어제는 이곳 수녀원 미사를 오기까지 내내 미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담배를 피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하고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심지어 버스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미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큰 미움이었다면 제가 그 미움을 즉시 알아채고 빨리 미움에서 벗어나겠지만 작은 미움들이었기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미움 안에 머물렀던 겁니다.
이는 마치 유리창에 크고 진한 흙탕물이 묻어 있다면 즉시 알아채고 닦았을 텐데 작은 먼지가 쌓이니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그 상태로 놔두는 것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늘 머물면 좋을 텐데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 수없이 작은 기대와 바람 때문에 계속 작은 미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칙칙하고 불만스럽고 유쾌하지 않은 삶을 내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볼 것은 인간의 사랑에 머무는 어리석음데 대해서입니다.
미움에 머물지는 않지만 인간 사랑에 머무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을 생각지 않는다면 인간 사랑에 머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요.
이는 마치 우리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 사랑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개를 사랑하고 개의 사랑에 머무는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개를 사랑하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문제라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정자가 아니라 집인 것과 같습니다. 여행 중에 잠시 머무는 곳은 정자도 좋지만 잠시가 아니라 내내 머물러야 할 곳은 정자가 아니라 집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 여정 중에 있습니다. 이 인생 여정 중에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 사랑이 다 나쁘지 않을 뿐더러 너무도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머물기도 하되 다만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임을 잊지 않으면 되고 하느님 사랑에서 물을 길어 인간 사랑을 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타인이 지옥일까, 혼자가 지옥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제자들과도 이루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에 따라 그 공동체가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을 닮던지, 아니면 모기떼와 같은 모습을 닮든지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수준에 따라 그 구성원들이 느끼는 기쁨도 다릅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공동체의 행복은 완전한 사랑에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도 당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법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해서 오는 기쁨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제자들도 똑같아 느끼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행복을 공동체에서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느끼는 행복보다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고통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 랍스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한 주인공이 이혼을 통보받습니다. 이런 경우 그런 사람들은 한 호텔로 끌려갑니다. 그 호텔 안에서 일정 기간 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혼인합니다.
이런 것이 싫은 주인공은 그 호텔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몰래 숨어 혼자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안 독신자 대장은 여자의 눈을 잃게 만듭니다. 이 사회는 결혼해서 살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난시라는 것만이 공통점이었는데 이제 둘은 공통점이 없어진 것입니다. 남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도 눈을 잃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던가, 아니면 랍스터가 되어 동물처럼 100년을 살던가.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솔로의 삶을 지향하여 고생 안 하고 솔로 지옥에 갇힐 것인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이유는 관계를 맺음이 혼자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관계 맺으시는 것처럼 타인은 지옥이라면 혼자 지내는 것보다 관계를 맺어감이 더 행복합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쓰레기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도 고아로 자란 장 씨는 가족이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아기의 아빠가 되어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얀 비둘기란 뜻의 ‘장 백기’로 딸의 이름을 짓고 혹시 친부모가 백기를 찾을지 몰라 재산의 절반을 털어 딸의 증명사진도 찍어둡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딸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백기를 돌봤지만 늘 부족했습니다.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아빠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큰 세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자랐습니다. 베이징에서 창업하여 7년 만에 사장이 되었는데 지금은 회사가 1억 위안(약 190억) 정도의 가치가 됩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 씨를 예수님이라 가정하고 장 솽치 씨를 하느님 아버지라 가정해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행복을 모르고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드님을 부르셔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세례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은 장 씨가 딸 백기에게 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는 법이 있습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합니다. 그만한 사랑을 받았으면 그만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게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그 보답을 하기 싫으면 그냥 공동체에서 오는 소속감의 행복을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백기 씨도 아버지께 받은 것을 보답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 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이 가운데 한 여인이 또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백기 씨가 아빠에게 소개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도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려면 분명 백기 씨가 자신에게 베푼 대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의 행복은 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사랑에 보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공동체의 행복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참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우리가 성당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도록 사랑의 법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서 줄을 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
피츠버그 대학 학자들은 관심과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건강 악화와 조기 사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적 접촉을 장려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 관심 기울이기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하루 20분씩 하는 것입니다. 2주 후, 성실히 이 운동을 따른 사람은 외로움을 덜 느끼고, 외롭다는 느낌이 1/4 정도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외롭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감정입니다. 실제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자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날 배려해주고 관심을 주면 좋겠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먹고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이에게 관심과 배려를 베푸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을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나’를 스스로 살리는 것입니다.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은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느끼는 것은 내 편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한 내 편은 ‘나’뿐입니다. 부모, 형제 역시도 따지고 보면 ‘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외로움과 고립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 편이 되어서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외로움과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물 수가 있을까요?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 받기만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랑이 아닌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라.
- 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머무름은 사랑의 참된 관계이며 관계는 사랑의 참된 기쁨이다. 애타게 찾던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충만한 기쁨에 이르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에게 충만한 기쁨이 있다.
머무름은 참기쁨으로 채워지는 참된 사랑의 새로운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머무름의 주님이시다. 머무름은 관계맺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계맺음은 받아들임의 참기쁨이다. 참된 기쁨은 과거의 기쁨에 갇혀있지 않다.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얻기에 기쁨은 언제나 살아있는 기쁨이 된다. 사랑은 가장 좋은 머무름이며 가장 좋은 기쁨이다.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의 복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을 곱씹어 보는 성모님의 달이다. 지극한 사랑 지극한 기쁨 지극한 머무름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머무름을 선물로 주신다. 최고의 기쁨은 함께하는 머무름의 참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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