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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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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2022년 5월 20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 1독서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고 당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0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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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기쁜 마음으로 거행하는 이 파스카 신비를 저희가 날마다 실천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복음
요한 15장 12-17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진호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2022년 5월 20일 (금)
최진호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무상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는 선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지요?

 

복음서를 읽다 보면, 가끔 동의하기 어렵거나 동의하고 싶지 않은 예수님 말씀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소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리고 특별히 서품식에서 듣는 말씀이어서 익숙하기도 하고 또 익숙한 만큼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제게는 이 말씀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의 기본 의미, 곧 우리 삶의 모든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는 그렇게 하느님께 직접 선택 받은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뽑기 전에 적어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해 주시거나, 그렇게 해도 되는지 먼저 동의를 구하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제 자유 의지를 이렇게 무시하셔도 됩니까?” 하고 묻고 싶은 것이지요. 조금은 엉뚱하지만, 어쨌든 저는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성소란 100퍼센트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100퍼센트 본인의 선택이다.”라는 말을 때때로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주도권과 제 자유 의지가 좀 균형이 잡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다음의 말씀에 제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가 맺게 될 열매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는 선물, 그 안에서 주어진 신앙이라는 은총,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지요? 우리를 끊임없이 선택해 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오늘 하루도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주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당부 정도가 아니라 계명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것으로 주님께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당신 사랑 안에만 머물라는 것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제자들의 사랑을 당신 안에 가두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면 제자들도 주님 사랑 안에 안주만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안주하면 편암함에 안주하는 게으른 안주가 떠오르지만 안주에는 게으른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달콤한 안주도 있고, 게으른 안주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달콤한 안주는 힘든 사랑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하지는 않는 사랑은 선물을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는 것보다도 이기주의적이고, 그리고 그 어떤 이기주의보다도 더 이기주의적인 사랑이며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이러라고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 머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다른 사랑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였다면 반드시 당신처럼 사랑하고 당신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고, 이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당부가 아니라 명령이고 의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주의적으로가 아니라 진실되게 주님 사랑에 머문다면 그 방식은 두 가지, 기도의 방식과 실천의 방식일 것입니다. 

기도로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 사랑으로 충만하고 넘친다면 결코, 그 사랑에 안주하지 않고 실천으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 당신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으로 우리를 친구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친구는 대등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등하게 여기시려 하는 것은 물론 우리도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뜻도 있지만, 그래야만 당신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는 이유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 다시 아버지께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인간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를 생각해봅시다. 하와는 죄를 짓고 자기 본성을 타락시켰습니다. 이때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아담도 자기 낮은 본성으로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밉니다. 아담은 그것을 받아먹고 같이 타락합니다. 

하와는 여기에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를 만들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온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라도 인간을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는 ‘소속감’입니다. 하느님이나 죄인이나 다 옆에 있는 사람을 자기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부부도 결국 오래 살면 친구가 되어가지 않습니까? 어쩌면 모든 관계의 끝은 ‘친구’일 수 있습니다. 

‘캐스트 어웨이’(2000)에서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너무 외로워 배구공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그와 친구를 맺습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미친 짓이라도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먼저 찾을까요, 아니면 엄마의 따듯함을 먼저 찾을까요? 해리 할로우의 실험에 의하면 새끼 원숭이조차 어미의 젖보다 따듯함을 먼저 찾습니다.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관계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조금씩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머무는 것은 내가 포기해야 할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다 하느님의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와가 아담도 자기와 같은 본성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뱀이 하와를 끌어 내리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유혹자가 우리를 죄짓게 하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다 자기 본성대로 친구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의 문제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와와 친구가 되면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휘둘리는 것입니다. 

감옥에 갔던 어떤 조폭이 깊이 회개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극악무도한 조폭 두목이었는데 교도소에 갇히니 자신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발도 묶어 항상 허리를 굽히고 다니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꼭 이래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교도관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짐승이라 하늘 볼 자격이 없어!”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나는 아직 인간이다!’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이 말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꿈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에게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따라서 우리가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당신을 동등하게 여기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이 성체성사를 통해 들어옵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나를 끌어내려 친구로 만들려는 낮은 본성의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 믿음 하나 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약해집니다. 이를 강화하기 위해 미사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면 강화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어 친구로 만들려 하지 않으면 이 믿음은 매우 약해집니다. 이웃을 끊임없이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기는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강화할 수 있을까요?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플 TV의 ‘핀치’(2021)란 영화가 있습니다. 핀치와 제프라는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굿이어란 개 한 마리, 또 개처럼 생긴 로봇 듀이가 나옵니다. 태양의 플레어 폭발로 인해 지구 오존층이 파괴되어 사람들이 대부분 죽은 세상입니다. 핀치는 과학자였기에 연구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굿이어는 자신이 맡아 키우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식량을 구하려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아이 가방에 들어있던 개입니다.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굿이어를 위해서라면 핀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모래폭풍이 다가와 오랫동안 그곳을 뒤덮을 예정입니다.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핀치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굿이어를 돌보아 줄 주인이 없습니다. 듀이는 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생명이 있는 개를 돌볼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핀치는 굿이어를 위해 인공로봇을 만듭니다. 핀치는 엔지니어입니다. 
이 넷은 먼 여행을 떠납니다. 로봇 제프는 사람처럼 생겼지만, 사람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합니다. 제프와 함께 이동할 때 로봇 개인 듀이가 죽었지만, 제프는 슬프지 않습니다. 핀치는 자기 몸이 죽어감을 알면서도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그래서 ‘신뢰’란 단어를 알려줍니다. 제프는 신뢰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핀치는 제프에게 신뢰란 단어를 자기 경험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가 직장에 들어왔을 때 가장 신뢰가 낮은 팀원들과 함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큰 건을 처리해 사장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때 핀치는 “제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한 것입니다”라고 공을 팀원들에게 돌렸습니다. 이것이 신뢰라고 알려줍니다. 제프도 조금씩 팀워크를 익혀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놀이하면 굿이어는 제프 대신 핀치에게 공을 가져옵니다. 아직 제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핀치는 숨을 거둡니다. 

제프는 핀치가 자신에게 강아지를 맡겼음을 압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통조림을 따서 음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통조림통이 제프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통조림이 따집니다. 핀치는 제프의 가슴에 굿이어에게 음식을 주도록 장치를 미리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아지에게 음식을 주자 강아지는 로봇을 따릅니다. 공을 던지면 자신에게 물어옵니다. 

강아지는 본래 로봇에게 귀찮은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답하지 못하는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치 핀치가 살아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얻습니다. 자기를 만든 창조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께 마치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기듯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보답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 어떤 보답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아버지께 인정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내어줍시다. 그러라고 우리를 파견하였습니다. 보답은 마지막 우리가 생명까지 내어주었을 때 예수님께서 안아주심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보답받으려고 하다가는 인간에게도 하느님께도 보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이웃에게 무언가 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줄 수도 있고 성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주면 “당신도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고, 선악과를 내밀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없어. 그저 인간일 뿐이야!”라는 믿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들려는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입니다. 남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하느님처럼 만들려고 해야 내가 하느님 자녀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이에게 성체를 주고 있나요, 아니면 선악과를 내밀고 있나요? 이것이 ‘나’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구란 ‘믿음’을 주는 대상입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믿음을 주고 있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처럼 여겨주셨습니다. 내 안의 주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시고, 이웃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십시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제가 지금까지 찾아낸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의 신적 본성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친구를 만들면 하느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랑

 

미국의 뇌신경학자 데이비드 린든은 그의 책 ‘터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생후 이삼 년 동안 아이를 많이 만지지 않거나, 껴안지 않거나,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재앙이 발생한다. 접촉의 결핍은 결코 나중에 만회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를 실험해 본 사람이 역사 안에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 황제입니다. 그는 원초적인 언어를 찾기 위해, 갓난아기를 독방에 두고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로 키워봤습니다.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 가장 원초적 언어라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결과는 갓난아기 모두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접촉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때, 늘 접촉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만지는 것을 절대로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심지어 가까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들을 만지셨고, 살이 뭉그러져 끔찍한 나병환자 역시 만지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접촉입니다. 
 
코로나 초창기, 어떤 할머니께서 제게 오셨습니다. 코로나 확진자와 같이 있었다면서 안수를 청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셔서 검사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저를 찾아와 바이러스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청하는 분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습니까? 안수해드리고, 이상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검사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만져주신 손길을 묵상해 봅니다. 사랑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런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랑이 사람을 살리고, 사랑 안에서 함께 사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는 단순히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는 종이 아닌 ‘나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종과 주인은 수직적 관계이지만, 친구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그만큼 주님과의 친밀감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

- 츠베탕 토도로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요한 15, 17)

 

사랑을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주님의 명령은 사랑이다. 주님의 명령같이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물들어가는 사랑의 복음이다.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사랑의 아름다운 명령이다. 

사랑이 삶의 본질이다. 다른 길은 없다. 삶의 가장 큰 신비는 단연 사랑이다. 살아있기에 사랑이 있다. 사랑만이 살 길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미처 몰랐던 삶의 의미를 주님 사랑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부활의 시간이다. 

삶의 길은 사랑으로 다시 시작된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복음의 참된 여정이다. 참된 사랑은 요란스럽지 않다. 순간순간이 사랑의 기도이다. 가슴 저리는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남아 있는 영원한 사랑의 명령이다.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 가장 특별한 명령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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