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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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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6주일 -

 

 

2022년 5월 22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람들을 뽑아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며,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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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기쁜 날, 저희가 정성된 마음으로 축제를 지내며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오니 지금 거행하는 이 신비를 언제나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4장 23ㄴ-29절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류성태 안드레아 신부 집전

 

 

2022년 5월 22일 (일)
류성태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산다면,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와서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존재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서 이 지상에 현존하시는 하나의 장소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그런데 오늘 제2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어린양께서 친히 그 도성의 성전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복음과 연결시켜 본다면, 참된 성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온 존재를 또 하나의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시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지만 무한한 영광을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되는 유일한 전제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그러므로 사랑하고 또 사랑합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성전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손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억과 실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시간적으로 순서적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말씀입니다. 1독서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의 사도행전 얘기입니다. 2독서는 더 나중에 실현될 천상 예루살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이 실천하고 그래서 주님 말씀대로 실현된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음주는 예수 승천 대축일이고, 그러니까 오늘은 주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인데 이 말씀은 크게 두 부분 곧 당부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부는 딱 하 가지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말을 지키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말씀을 지킬 거라는 당연한 말씀인데 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킨다는 말은 우선 잃지 않도록 지키는 것인데 그것은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이고 그러니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면 지킬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주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면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지켜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고, 주님 말씀을 개떡같이 여기면 금세 잊어버릴 것이고 아무것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억과 추억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되는데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의 두 번째 뜻은 주님 말씀을 잃지 않고 소중히 간직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 곧 기억한다는 것은 실천하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오늘 사도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이렇게 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얘기는 이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몇이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유대인이 아닌 이들에게 말을 하여 그 말이 맞는지 논란이 일어났고 그래서 사도들의 첫 번째 총회 곧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 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성령과 함께 결정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며 성령의 인도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한 사도들은 말씀대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첫째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는지, 둘째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나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을 하는지, 셋째로 중요한 때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주님 말씀을 지키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그 지킬 힘이 되실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남편에게 가서 돈을 받아서 자녀를 위해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은 이 평화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라는 큰 그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씀과 성령을 주어야 할 자녀들을 위해 그것을 주실 분을 만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더 위대해서 하느님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평소에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내가 그분께 좌지우지하시게 했다면 언제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아직 기도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가 된 것이 하느님 탓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웠다면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청해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 사랑도 믿지 않고 하느님 능력도 믿지 않고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도 믿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으며 그분께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이 시대는 모험의 시대로 수많은 이들이 바다와 북극과 남극, 혹은 높은 산을 정복하려던 영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서로를 위해 주고 각자의 일을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해역에 서식하는 바다코끼리에서 따온 지명)에 도착한 처지에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 중 선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섀클턴은 한 달 후에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탈출하라고 명령합니다. 비틀거리는 배에 부딪힌 파도는 곧바로 얼어버렸고, 9일째가 되면서 커드 호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스러워졌습니다. 나무와 돛, 줄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간신히 물에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 않은 젖은 옷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 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손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전신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1916년 5월 (천신만고 끝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 직후) 섀클턴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와 다른 두 사람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천m, 험한 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있고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무도 넘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산이었고 당연히 지도도 없었습니다. 

“섬의 지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우스조지아의 해안에서 안쪽으로 단 1km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섀클턴)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을 넘습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구조선을 얻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편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탐험의 성공보다도 더 큰 성공이었습니다. 인간성의 위대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섀클턴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분명 더 위대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섀클턴처럼 십자가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도 주님께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

 

“5년 전 자기 모습을 떠올린 뒤 그때 이후 생긴 변화를 종이에 써 보십시오. 다 적었으면 이제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부분도 적어보세요.” 
 
다 적었으면 이제 두 목록을 비교해 보십시오. 분명 5년 전의 모습에서부터 이루어진 변화가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변화보다 훨씬 더 길고 놀라운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행동과학자 그레이스 로던이 했던 것으로 이를 통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돌아보며 큰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다가올 5년 동안은 그리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과거 5년 동안의 변화가 있었듯이, 다가올 5년 역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단순하게 시간이 지나면 다가오고 마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이 미래 역시 나의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시간입니다. 
 
다가올 5년의 미래, 아니 그 이상 넘어가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지금, 자기의 장애물을 하나하나 줄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림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해 성령을 약속하시지요.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해 주십니다(요한 14,26 참조). 성령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살며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삶의 기쁨이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도, 겁을 내는 것도 아닌 진짜 평화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멀리하면서,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 Dum spiro spem 라틴어 속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요한 14, 28)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은총의 시간이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에 삶의 참된 방향도 있다. 삶의 방향과 삶의 참된 목적지를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사랑의 삶을 기쁘게 살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삶이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기쁨의 귀결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품고 품어서 사랑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날마다 구원의 이 여정을 걸어가게 하시는 참된 보호자이시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밀어 주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쏟아지는 은총의 길을 걸어 가신다. 끝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가시는 하느님이시다. 기쁨과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랑으로 끝내 승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다.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모성월의 기쁨이다. 기쁨으로 활짝 열리는 사랑의 놀라운 찬미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기쁘게 만나고 기쁘게 기도드리는 기쁨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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