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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2022년 5월 2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일행이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리디아가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진리의 영을 보호자로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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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저희가 언제나 그 풍요로운 신비를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5장 26-27절, 16장 1-4ㄱ절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주민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5월 23일 (월)
박주민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은 늘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의 책장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을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마다 또한 종교마다 믿고 따르는 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곧바로 적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이단이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서로 죽여 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예수님을 죽였고, 누군가는 그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죄명으로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와 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신의 적대자가 됩니다.”
우리 또한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과 신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는 내 하느님을, 내 신앙을, 내 교회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의 귀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바오로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해주셨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을까요?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 여자들이 같이 듣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겠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린다는 말씀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문만 두드리시지 문을 여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서 여기서 주님은 신자들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나무라시며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마음의 귀는 있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억지로 여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는 하시는데 그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 또는 영적인 마음의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육신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이고, 마음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귀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말에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마음의 귀, 관심을 잠자는 귀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귀는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자고 있는 마음의 귀에 성령께서는 계속 속삭이십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계속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겁니다. 실바람 소리로도 빗소리로도 청천벽력같은 소리로도.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처음에는 전혀 듣지 못하다가 또 두드리시면 어렴풋이 듣다가 계속 두드리시면 차츰 마음의 귀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잠이 얼마나 깊이 들었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이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그리고 살짝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발딱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깊이 잠든 사람의 귀를 깨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두드림과 더 강한 두드림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깊이 잠들어있는 사람인지, 나는 얼마나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인지, 프란치스코의 말대로라면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라면 맛있게 끓이는 방법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음식은 아마도 ‘라면’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많은 이가 좋아하는 이 라면을 끓일 때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요?
1) 면을 먼저 넣는다.
2) 스프를 먼저 넣는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 2번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 점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데, 스프를 미리 넣으면 100도 이상에서 끓게 됩니다. 더 높은 온도에서 면이 익으니 더 쫄깃해진다고 주장합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라면 봉지를 보면 조리법이 나옵니다. 그 조리법과 분명히 다릅니다. 조리법에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는다.’라거나 ‘면을 넣고 스프를 넣는다.’입니다.
이 라면을 만든 사람은 이 라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라면 전문가가 적은 조리법이 최고로 맛있게 먹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전문가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솔직히 그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미식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 맛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익숙한 조리법이 최고인 것처럼 각자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가장 맛있게 먹을 때는 ‘배고플 때’가 아닐까요? 간절할 때가 늘 최고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때는 언제였을까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게 되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간절함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주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며,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반응을 미리 이야기해주십니다. 세상은 주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제자들을 박해하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라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의 순간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오신 보호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할 때, 세상의 박해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간절함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세상의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 또 함께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지만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 Dum spiro spem 라틴어 속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 15, 26)
서로가 서로에게서 몰랐던 이 사실은 우리들 사이에 예수님이 없다는 이 사실이다. 인간적인 것만 잔뜩 있을 뿐이다. 예수님을 잃었기에 사랑의 진리도 잃은 것이다. 보호하고 보호받는 사랑의 관계로 사랑을 되찾아 주신다.
생명의 길은 서로 사랑하는 사랑에 있음을 우리들 삶에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사랑으로 삶을 가르치시는 관계의 참된 보호자이시다. 거짓에 빠져 살던 우리가 참된 진리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 커서 안 보이는 예수님을 다시 보게 하시고 다시 만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님의 길 하나하나가 서로를 살리는 참된 진리였음을 깨닫게 하신다. 좋은 사랑은 좋은 일로 드러난다. 내어주시는 가장 좋은 사랑을 알게된다. 옳고 그름의 분별 사이에서 또 다시 떨어져 나가는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에서 실천을 쫓아내면 사랑은 진리일 수 없다. 참된 진리는 실천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진리의 영에서 언제나 가장 멀리 있는 우리들이다. 진리의 영에 가까워지는 삶이 복음의 삶이다. 처음부터 함께 하시기에 다시금 실천의 첫 단추를 잘 끼우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진리는 삶의 실천으로 서로를 살리고 있다. 생활의 진리를 만나는 은총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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