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5.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2022년 5월 25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어 저희가 신비로운 이 예식으로 성자의 부활 축제를 지내며 다시 오시는 그분을 모든 성인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6장 12-15절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하상헌 윤호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5월 25일 (수)
하상헌 윤호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정한 종교심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저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그래서 저의 하느님 이해와 종교적 확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준 말씀이기에 너무도 좋아하는 얘기이고 자주 예를 드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오늘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긍정적인 접근 태도와 선교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선교할 때 부정을 하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가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문화와 사고 방식을 우리를 기준으로 부정하고 그러면서 그러니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바꾸게 하며, 교리를 포함하여 내가 전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그들에게 잘못이 있고, 잘못 생각하거나 아직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잘 알려주고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선교이긴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부정은 그대로 부정이 되고, 교만한 부정도 부정이 되어 선교는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니라 개인적인 친교나 관계에서도 그대로입니다. 누가 나에게 '너는 잘못됐어, 아주 깡그리 잘못됐어'라고 하면 성인 군자가 아닌 이상 내가 뭐가 잘못됐냐고 방어를 할 것이고, 그런 너는 잘못이 없냐고 오히려 역공을 하며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반면 긍정적인 면을 진심으로 긍정해주고 그러나 한 가지 부정적인 면이나 부족한 것을 사랑과 겸손으로 얘기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심이 대단함을 긍정해줍니다. 미로 그런데 아테네인들의 종교심이란 것이 부정적으로 접근하면 미신을 믿는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인데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종교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봐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긍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르는 신을 인정하고 있다며 아테네인들을 극찬합니다. 

사실 모르는 신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심이고 신앙의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이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본래 신은 다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래서 본래 모르는 신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나는 신을 다 알지 못한다고 그러나 하느님은 계시고 사랑이시고 선이실 거라고 믿으면 가장 완벽한 종교심이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없다고 하거나 나는 신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데 무신론자나 유대인은 신에 대해 정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다 한 부분을 알고 있을 뿐이고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주장도 다 일리가 있을 뿐입니다. 너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나의 주장도 일리가 있을 뿐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고, 하느님께 대한 모든 진리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모든 진리를 가르쳐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교리도 모든 진리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계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알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완성이시고 성령께서는 이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인도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다고 하는 것이 더 문제임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이 충만하면 성경해석이 잘 될까?

 

오늘 복음은 말씀을 전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지금은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성령의 역할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하시는 말씀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가톨릭 잡지에 글을 쓸 때, “예수님은 유다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분이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은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로 바꿔서 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키지 못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십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저 아드님한테서 들으신 말씀을 당신 생각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이신데도 말씀에 한마디도 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말씀을 해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 불리는 ‘유주얼 서스팩트’는 주인공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을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런 해석을 통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해석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또 최고의 반전 영화는 ‘식스 센스’입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작 죽은 유령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작 자신이 유령임을 깨닫게 되는 때는 해석하는 대상이 아닌 해석 당하는 대상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감히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말씀에 해석 당하는 대상입니다. 감히 성령께서도 말씀을 해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해석하려는 것은 말씀 위에 서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사람도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 시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열이 일어납니다. 해석은 호해를 낳고 분열을 낳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베드로의 믿음 위에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기 어디에도 베드로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어렵습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행하신 성찬례가 예수님의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몸과 같이 여기라거나 그냥 예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예식을 거행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또 그들은 진리의 기둥이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모님을 하느님처럼 섬긴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어떻게 인사하였습니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성모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분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2-43)

친구의 어머니도 공경해야 하는데 주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을 질투하실까요?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께 공경을 올렸고 이것은 태중의 아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왜 “말씀만으로!”란 기치를 들고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지 못할까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니다. 이것처럼 해야 합니다. 말씀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믿고 순종할 대상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아버지가 죽으며 밭에 보물이 있으니 파서 갖는 사람이 임자라고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밭은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밭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계속 밭을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 않자 첫째는 아버지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돌밭을 파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래도 둘째는 열심히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니 정말 엄청난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몸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의견이 달랐을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분명 자신에게 좋은 일임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류에 빠졌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 보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을 믿게 만들어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순종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녀에게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밭을 파 보면 보물이 나올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도 첨가하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먼저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가장 완전한 해석입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이해’입니다. 한 말씀에 여러 해석이 나온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 개의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분열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 문제로 갈라진다면 그건 사탄에게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내가 진리의 기둥인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여 옳고 그리고를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게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려는 사람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을 두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신력이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며느리가 새 식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신혼집에 방문하신 시부모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데 글쎄 밥을 태운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인상을 쓰면서 “너는 친정에서 밥하는 것도 못 배웠니?”라고 나무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시어머니는 “내가 한 번 봐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미안하다.”라면서 오히려 사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시어머니 중에 누가 정신력이 강한 분일까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며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정신력 강한 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신 다음 제자들을 홀로이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과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말씀하셨었지요. 
 
첫째, 진리의 성령으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며(요한 14,16-17),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며(요한 14,25-26), 셋째,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증언할 것이며(요한 15,26), 넷째,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8). 
 
오늘 복음에서는 이제 다섯 번째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안내자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외의 또 다른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여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로 제자들을 이끄시는 안내자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의 안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 코율릿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사랑은 이런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받아들일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삶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힘 사랑의 진리이다. 진리는 하느님의 것이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진리이시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림과 빠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참된 결행(決行)이다. 

지금과 나중 사이에 이끌어가시고 알려주시는 성령이 계시다. 이 좋으신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진리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기쁜 여정이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진리의 영을 인정하고 믿는 실천이다. 

사랑은 기꺼이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실천이다.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처럼 서로 돕는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려주시는 진리의 영이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길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나눔의 길이 된다. 지금과 나중을 이어주시는 진리의 영께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