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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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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2022년 5월 28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 달변가 아폴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8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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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6장 23ㄴ-28 절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방성수 야고보 신부 집전

 

 

2022년 5월 28일 (토)
방성수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나요?

 

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근거지와 선교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짧게 소개하는데 이 엄청난 선교를 이렇게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듯이 소개해도 되는지 생각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문장으로 요약된 것 안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여기에 바오로 사도의 선교 Pattern 곧 형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안티오키아가 바오로 사도의 선교 근거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14,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15,35)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18,22) 

저는 여기서 근거지와 선교지 관계를 보고자 합니다. 안티오키아가 근거지라고 함은 선교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가 없다면 그래서 한 곳에서 줄곧 머문다면 그곳은 근거지가 아니라 주거지거나 고향이겠지요. 

프란치스칸인 제겐 이런 삶이 오랜 꿈이고 영원한 꿈입니다. 근거지는 있되 어디고 눌러 앉아 살지는 않는 선교의 삶 말입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소명을 프란치스코가 받았고,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같은 소명을 그 후예인 저도 받았음을 깨달은 이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저는 무작정 목포 북교동 성당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 본당에 속한 섬에 가서 한동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그것이 1980년대 후반이고 간 곳은 신안군의 자은도라는 작은 섬이었으며 그 첫 시도가 발전한 것이 지금의 저희 순회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교회는 점차 순회 교회에서 정착 교회가 되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 다시 순례자와 나그네 정신을 불어넣었으니 이것을 교회는 정주 영성과 다른 탁발 영성이라고 일컫습니다. 

아무튼, 다시 얘기하면, 근거지가 있다는 것은 선교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지에 한동안 머문 바오로 사도는 이제 3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갈라티아와 프리기아 지방을 차례로 거쳐 갔다고 사도행전은 얘기하는데 차례로 갔다는 것은 이전에 늘 가던 선교지가 있고 차례가 있었다는 표현이고, 실제로 그 이전에도 이 지방을 순회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습니다.(16,6 참조) 

이렇게 떠나가서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은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는 것입니다. 직접 선교도 하지만, 그곳 사람들을 제자로 키워 선교하게 했다는 표시인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제자로 키운 것은 그들을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구나 자기 선교지가 있어야 하고 "가서" 주님의 교회를 재건하라는 소명을 받은 프란치스칸은 더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안주처가 아니라 근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몸으로 달려갈 선교지가 없다면 마음의 선교지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나를 찾는 주변 사람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이다.

- 마리 퀴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6, 27)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믿음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이다.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만나는 믿음의 시간이다. 믿음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올바른 방향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흠숭이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우리 영혼을 다시 은총으로 깨어나게 한다. 만남을 여는 믿음의 현존이 기도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이며 우리들 삶 자체이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실천하기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의 실천인 것이다. 기도의 실천이 곧 자기정화이며 공동체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서로 나누고 서로 존중하는 믿음의 진실한 공동체를 꿈꾸어본다. 미룰 수 없는 믿음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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