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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9일 (일) 주님승천대축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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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승천대축일 -

 

 

2022년 5월 29일 (일) 주님승천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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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24장 46-53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46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2022년 5월 29일 (일)
주님승천대축일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9일 (일)
주님승천대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자신의 삶 안에서 찾고 발견하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시고 다시 하느님 품으로 가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승천’, 곧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리적으로 이 땅을 떠나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 저 먼 곳으로 가셨을까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말씀하셨으니, 떠나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머물며 함께 사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주님께서 오르셨다는 그 ‘하늘’과 그분의 ‘승천’은 우리를 떠나 저 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욱더 하나가 되시고자 이 세상 깊은 곳으로 내려오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승천 사건을 복음서보다 더 자세하게 들려주고 있는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라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그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라고 알려 주는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이제 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 영적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이 지상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서 찾고 발견하라는 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에서 보여 주셨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다시 한번 우리의 손과 발로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내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세상 안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으로 깊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찬미하며, 우리도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몸소 보여 주신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승천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땅에서 하늘을 살자!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 본기도는 둘중의 하나 선택해 읽도록 되어 있는데 올해는 이 본기도들을 가지고 묵상을 해봤습니다. 첫 번째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본기도는 첫 마디로 성자의 승천이 우리를 들어 높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장 질문을 자아냅니다. 성자의 승천은 성자를 들어 높인 것 곧 성자의 영광이지 어찌 우리의 영광인지. 

그러나 우리는 이내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지요. 성자의 승천은 성자만이 하늘로 오르심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오르심이고 우리와 함께 오르심이라고. 

그렇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셔서 우리를 버려두고 혼자 오르신 게 아니라면 우리를 위해 오르신 것이고, 먼저 오르신 것, 곧 우리를 위해 먼저 오르신 것이고, 그러니 우리를 높이신 것이 맞고 우리는 그 기쁨으로 가득 참이 마땅할 것입니다. 


- 일체적 관계 

사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이는 주님과 우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일체의 관계, 마치 하느님의 관계가 삼위의 일체이듯 성자와 우리도 일체의 관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비체론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했는데 이처럼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 희망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머리이신 주님께서 올라가신 그 하늘에 지체인 우리도 희망을 둬야 함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데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러니 참으로 행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희망이 있어도 거기에 희망을 둬야 그 희망이 유의미하니 이 축일에 우리는 나의 희망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선사하신 희망이 나의 희망인지 돌아볼 기회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희망을 둔 나는 아닌지 말입니다. 


두 번째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 구세주이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하늘로 오르셨음을 굳게 믿사오니 저희가 하늘에서 아드님과 함께 길이 살게 하소서." 

두 번째 본기도는 하늘에 희망을 두고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길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월피정을 위해 한달에 한 번 오는 홍천 <여기 피정의 집>에 와 있는데 이 집에는 제가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자!"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땅에서 하늘을 살아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보다 앞서 가신 주님께서 계신 곳, 먼저 가셔서 우리 자리를 마련하신 곳으로 우리는 가야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궁극적 기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본기도를 우리는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뿐 아니라 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저보다 연세 높으신 분들은 특히 그리고 꼭!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 승천, 떠나시는 것이 사랑인가?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실 때 내가 가장 크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여야 일치할 수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엄마가 지켜볼 때 공부하는 것과 지켜보지 않아도 공부하는 거 중에 어느 것을 더 원하십니까? 지켜보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아이가 성숙한 아이입니다. 

부모들도 처음엔 지켜보다가 이젠 자녀를 믿고 볼일을 봅니다. 이때 자녀가 부모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자기 자신과 싸울 때 가장 큰 발전을 이룹니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에서 저자 앤절린 밀러는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심리 상담 학위가 있던 준비된 엄마였습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술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닮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고쳐보겠다고 완벽한 아내가 되려던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술은 안 마시지만 심한 불안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밀러는 그런 남편에게 엄마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도 우울증과 분열증과 같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는 이 모든 문제가 가장 완벽하다고 여겼던 자신 때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상담사가 어느 날 밀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자녀 행복의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이번엔 딸에게 묻습니다. 

“네 행복에 대한 의무가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엄마는 왜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을까요? 지신이 불행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입니다. 부모 탓을 하고 있기에 자녀들에겐 그런 부모가 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자신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코디네이터’였습니다. 완벽히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가족들을 도구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행복의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데서 해결됩니다. 어느 날 하루는 정원에 큰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나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남편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싸우는 가정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화를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자신의 탓으로 여기면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막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때 아내의 말에 깜짝 놀라 자기 행동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책의 첫머리에 이 말은 그녀의 후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억제하지 못할 때면 나는 네 신발을 집어주고, 네 배낭을 져 나르고, 네 교통 법규 위반 벌금을 납부하고, 네 상사에게 거짓말로 핑계 대고, 네 숙제를 해 주고, 네 앞길에서 돌멩이를 치워주고, ‘내가 직접 했어!’라고 말하는 기쁨을 네게서 뺏겠지.”

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마인 줄 알고 나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아주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떠맡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 말이다.”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이의 행복까지 책임지려 하는 것은 나의 행복도 다른 이가 책임져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를 방치해야 할까요? 방치란 사랑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귀찮을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야 합니다. 맡기려면 힘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오는 일을 맡기셨을 때 지팡이를 주신 것처럼, 주시고 맡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하루 동안 길에 버려놓고 몰래 아이를 지켜봅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아이에게 언젠가는 이렇게 부모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예수님도 그냥 하늘로 오르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성령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들도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밤새 정글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라집니다. 아이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겁을 먹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필요할 때 활을 쏠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이 활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두려움 없이 믿고 살며 성장하도록 하늘에서 우리 주위에 활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쏘셔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분이 보이시지 않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처럼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는 어미 새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분의 믿음을 실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려주실 성령을 기다리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떨어지는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날갯짓만 하면 됩니다. 물론 계속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을 주지 않고 떨어뜨리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야만 그 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를 떨어뜨린다는 말은 새끼 새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게 하려면 일단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해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제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처럼 하기 위해 끊임없는 날갯짓을 하면 힘이 붙어 날게 될 것입니다. 이 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날갯짓하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대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날갯짓은 언젠가 성령을 불러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시킬 것입니다. 저에게 이 날갯짓이란 이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을 가장 힘센 분이라고 말하는 이유

 

군대 제대 후에 당시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는 사회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면서 아르바이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택했던 일이 주유소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주유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손님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무시하는 말투, 욕이 섞여 있는 반말, 자그마한 실수에도 큰 죄 지은 것처럼 화를 내고 혼내는 모습에서 세상살이가 쉽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기간이 빨리 지나서 학교에 복학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어떤 연세 지긋한 형제님과의 만남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분은 주유원에게 절대 반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휴지 가져와라, 사은품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지금은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사은품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꼭 무엇인가를 주셨습니다. 사탕, 귤, 일 끝나고 따뜻한 호빵이라도 사 먹으라면서 돈을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분만 오시면 기분이 좋아졌고, 이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각 휴지를 하나만 드려야 하는데 몰래 두 개를 드리기도 하고, 차가 지저분하면 살짝 세차도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분을 보며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되었지요. 
 
사랑의 실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 변하는 누군가를 만들 수가 있으며, 나 역시도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은 약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가장 강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힘센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깨우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다음으로 구원의 길은 온 세상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담당해야 할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사랑의 힘으로 주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을 닮은 삶,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전달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계속된 사랑의 전달로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랑받는데 익숙한 약한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데 적극적인 가장 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더 심오한 의미의 연관성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이 의미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인식한다.

- 페터 부스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 51)

 

사랑의 방식은 승천의 방식이다.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주님 승천은 본래의 사명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위대한 진리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준다. 삶의 방향과 시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승천으로 구원의 참뜻을 실천하신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을 피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삶을 승화시켜 주신다. 승천으로 더 큰 변화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기쁜소식은 이와같이 끝이 없다. 승천은 더 큰 사랑의 성숙이며 봉사의 적극적인 확장성이다.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안목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삶은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뜨거운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인격이 나가야 할 방향을 주님의 승천은 희망이 되어 우리를 이끈다. 

인간 소외를 치유하는 승천이며 승천이 있는 곳에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있다. 주님의 입장은 승천이며 우리의 입장은 인식의 전환이다. 사랑은 승천처럼 뜨겁게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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