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6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
2022년 6월 1일 (수)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고 떠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기도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본기도
하느님, 복된 순교자 유스티노에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지혜를 깊이 깨닫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그릇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참된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7장 11ㄷ-19절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지영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6월 1일 (수)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최지영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1일 (수)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요?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전하는 고별 담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바오로는 그들이 자신과 양 떼를 잘 돌보고 늘 깨어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염원하며 마지막 당부를 남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서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흐느껴 울고 포옹한 다음, 그들은 바오로를 배웅하며 떠나 보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서로서로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장면은 큰 감동을 줍니다.
한편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거룩하신 아버지의 일치된 관계처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로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바치시는 이 기도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마지막 여정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제자들도 이를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당신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며 바치신 이 기도에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면, 마땅히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또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보살핌에 응답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별할 때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둘 다 이별할 때 주님과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러니 이별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지난번 동포 미사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어떤 말씀을 남기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유언을 준비한 분이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준비된 유언은 없어도 이제라도 말씀해보시라고 하니 모두 하나같이 하느님을 열심히 믿으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아야 할 것은 하느님이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대면해야 할 분도 하느님이며 그러니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말도 하느님을 열심히 믿으라는 말씀이어야겠지요.
얼마 전 저희 수도원에서 유언장을 모두 작성하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작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이나 장기를 기증했거나 기증할 것인지,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밖에 연락할 곳이나 여러 사안에 대한 입장을 남기라고 한 다음 마지막으로 형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기라고 하였는데 저는 남길 말이 하나도 없었고 아무 흔적 없이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아무 말을 남기지 않으려는 저의 마음이 가난이나 겸손인지, 아니면 사랑 없음인지.
제가 뭐 대단하다고 형제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는 말인가? 이렇게 유언을 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 세상에는 미련이나 애착은 말할 것도 없고 진정 털끝만큼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이 진정 저의 가난과 작음인 것인지, 형제들에 대한 저의 사랑의 부족이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 저에게는 두 가지가 다 있었습니다.
변명할 여지 없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저에게 없었고, 형제들이 저의 유언을 소중히 여길 거라는 믿음도 없었던 거였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적지 아니 충격을 받았고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제게 없을 리 없고 형제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을 리 없지만 그리 크지 않은 거지요.
다시 지난 동포 미사 때 동포들이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남긴 유언을 자녀들이 소중히 여길 거라고 믿느냐고 제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분들은 모두 자신 있게 그럴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자식 가진 부모들도 같을 겁니다. 저도 몇 명의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형제와는 이런 사랑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갓 들어온 형제가 그래서 저와 같이 살아본 적이 없는 형제가 저의 유언을 귀담아들을 것이라고 저는 믿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인데 한 사람의 작은 사람으로 숨어 살 수 있는 큰 공동체 생활의 한 단면, 그러니까 익명성의 한 단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향력 있는 세계 지도자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77억 인구 중에 지구 한구석에서 죽은 한 명의 죽음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을 존재의 익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큰 공동체에서도 이럴 수 있는 거지요.
존재의 익명성에 기대어 살다가 사랑도 믿음도 익명성에 숨어버리는 나의 인생이 아닐지, 끝까지 그런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것은 아닐지 심각하게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구원의 확신을 위한 두 조건 : 이름과 진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제자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이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처럼 제자들의 공동체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제자들에서 벗어나서 결국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나가 아닌 하느님을 상상할 수 없듯, 하나가 아닌 구원의 공동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일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두 가지를 아버지께 받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는 ‘이름’이고 하나는 ‘진리’입니다.
먼저 이름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면 자신이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과 믿음입니다. 제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일원이 되려면 이 나라에 맞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이름은 이 나라가 인정하는 한 시민이었던 저희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주민등록증이 생겼고 이 이름으로 나도 대한민국 시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법 체류자들이 있지만 유럽은 더 많습니다. 불법 체류자들은 매우 불쌍합니다. 그들이 경찰에게 발각되면 거의 인간 취급받지 못합니다. 경찰들은 먼저 그들을 때리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경찰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시들이 저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갔습니다. 처음 당해보는 소매치기여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의 손목을 붙들고 계속 얼마 전에 배운 단어인 ‘폴리지아’(경찰)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액수의 지폐는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폴리지아를 외쳤더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진 모든 돈을 저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집시들의 돈을 턴 유일한 한국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렇게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바로 ‘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세례명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 백성으로 인정한 교회가 준 이름입니다. 제 이름도 나라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시민이었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그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7,12)
여기서 “멸망하도록 정해진”의 직역은 “멸망의 자녀”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가리킵니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받은 이름에 대한 확신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에 대한 확신을 지니도록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코리텐 붐 여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소련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려고 하는데, 예배당 문을 걷어차면서 두 명의 소련 군인이 들이닥쳤습니다. 기관단총의 총부리를 겨누어 흔드는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 내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라. 예배당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음을 맛볼 것이다.”
모든 신자가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견디고 있는 순간,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계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군인들은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라고 소리쳤습니다.
남아 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거룩한 표정으로, 자기들의 주님을 위해 죽을 각도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총을 땅에다 내려놓은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께 함께 경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받은 이름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성호경’입니다. 언제 어디서건 성호경을 그을 수 있다면, 심지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성호경을 그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름을 지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닌 것에 참 행복과 기쁨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진리’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신 듯이 살면 진리를 지닌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해야 합니다. 곧 사랑의 행위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느님의 뜻이고 법입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의식만 가지고 범죄를 저질러도 될까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법을 지키며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 유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거기서 요구하는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아버지의 법을 지켜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당신은 당신 공동체에 당신 법을 주어 그 법으로 그 공동체의 일원들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나라에서 살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배려하고 봉사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커다란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옥사나 말라야를 생각해봅시다. 인간이지만 자신이 개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인간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그 공동체에 머물려고 노력하면서 거룩하게 됩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은 네덜란드의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안전한 곳에 숨겨 주다가 독일군에 체포되었고, 그녀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환경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코리는 환경에 불평하다 언니 벳시에게 혼이 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힘입니다. 코리는 부모님과 언니 벳시를 수용소에서 잃게 됩니다. 그것도 눈앞에서 학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코리 텐 붐 여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코리는 막사 안에서 예배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 금지되었지만 코리의 방에서는 허락되었습니다. 간수들이 벼룩이 하도 많이 그 방에는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리는 감사했습니다. 혹독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들을 돌보았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뮌헨의 한 교회에서도 전에 외치던 것처럼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말씀을 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후 한 남자가 자기 앞에 다가와서 “오늘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손을 내민 자는 예전에 총을 들고 여자 죄수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재촉하며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악명 높은 수용소의 독일군 간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군요. 당신도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죽은 언니가 생각나서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아직 주님께 용서받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느님, 내 마음속에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니까 마음이 열리고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코리 여사는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그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여사는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뿌리 깊은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유 받고 그 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그의 책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름과 진리, 이것을 간직합시다. 이름은 내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이는 기쁨을 줍니다. 또 진리는 그 믿음답게 살아 구원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해내는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이기에 당연히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아는 삶입니다. 이로써 거룩해집니다. 나에게 이 이름과 진리가 있다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고 오늘도 거룩해져 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자녀라 항상 기쁘며, 그래서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매일 거룩해지고 있다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운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방주시입니다. 물론 주변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더라도 얼른 전방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70%의 전방주시, 30%의 ‘주변 파악’을 하며 운전하는 사람을 소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전방주시를 잘하면서 운전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전방주시가 필요합니다. 전방주시는 바로 자신의 목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운전하면서 전방주시를 하지 않고 주변만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큰 사고가 나서 원하는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 것들은 바로 주변의 것이 아닐까요? 전방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전방주시를 하지 않고, 주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돈과 명예만을 바라본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똑바로 갈 수 있도록 전방 주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야 할 곳을 잃어버려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만을 바라보며 방황한다면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님이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 진리에 몸 바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빠짐없이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청하시지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이는 세상이라는 세속적 영역에서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거룩함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더 쫓으면서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를 전방 주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전방주시는 곧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이런 것만을 바라보면서 나중에 후회할 삶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만이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긍정은 부정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껴안고 넘어서는 데 있을 것이다.
- 백무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 11)
하나의 사랑이다. 하나되는 이 일치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 여정이다.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에 하나되는 구원이 있다.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향한다. 모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되는 일치에서 시작한다. 하나의 목숨이며 하나되는 나눔이다.
구원은 사랑이다. 하나의 삶 안에서 참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우리들 삶이다. 아무리 많아도 삶을 철들게 하는 것은 하나의 십자가이다. 내어주지 않고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했다. 하나의 진실한 사랑으로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사랑은 반성을 통하여 철이 들고 영글어간다. 하나되시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살린다는 것은 하나되는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하나되는 일치이며 하나되는 일치는 기도와 실천 나눔과 반성으로 삶은 아름다워진다. 하나의 목숨이며 하나의 삶이며 하나의 사랑이다. 하나의 마음이 간절한 기도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6월 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6.04 |
---|---|
22년 6월 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6.03 |
22년 6월 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6.02 |
22년 5월 3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31 |
22년 5월 30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30 |
22년 5월 29일 (일) 주님승천대축일 매일미사 (0) | 2022.05.29 |
22년 5월 2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5.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