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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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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2022년 6월 3일 (금)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페스투스 총독은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며, 바오로가 임금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물으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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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복된 가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의 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21장 15-19절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지영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6월 3일 (금)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최지영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3일 (금)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시 시작하는 사랑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가 매우 사랑이 가고 본을 받고 싶습니다. 깊어진 그의 내면을 볼 수 있어서입니다.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면서도 진실합니다. 이전의 즉흥적이고 자신만만한 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의 베드로는 다분히 즉흥적이고 자신만만한 면이 있었습니다. 수난의 때에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고 주님을 잡으러 오자 칼을 빼서 병사의 귀를 베기도 했잖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객기였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거나 사랑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지금은 그때보다는 거짓 열정이라는 거품이 빠진 진실한 사랑일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 정도를 아는 그는 이제 사랑한다고 자기 입으로는 할 수 없고 자신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시니 주님께서 다 아시고 잘 아시지 않냐고 답합니다. 

사실 주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고, 특히 주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사랑에 대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그리고 나의 사랑 정도를 아는 겸손이 있다면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부족하여도 사랑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그래서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것은 현재 우리 사랑의 양이 아니라 의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고백 성사를 볼 때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고 다른 분에게 고백 성사를 줄 때도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는 보속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많고 큰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고, 과거 완료적인 사랑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랑'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못 사는 건 죄가 아니다. 내일도 그러면 죄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악당 대부분은 자신들을 악당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당이 악당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정당할까요? 

1931년 5월 7일, 뉴욕 한복판에서 150명의 경찰관과 한 명의 범죄자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살인자는 ‘쌍권총 크롤리’라 불리던 남자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순직합니다. 

크롤리는 한적한 길에서 애인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다가와 운전면허증을 요구하자 총을 꺼내어 경찰을 마구 쐈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총을 빼내 이미 죽은 경찰을 향해 또 한 발을 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중에 그는 이런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관계자분께…. 내 옷 안에는 피곤하고 지친 심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심장은 따듯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심장입니다.”

그가 싱싱 교도소에서 사형당할 때의 나이는 고작 19세였습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에게 “이 망할 놈들!”이라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인 대가가 이런 거군”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모든 살인이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지키려 했던 대가가 이런 거군”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뉴욕의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의 소장인 로즈와 몇 차례 서신을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흉악범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싱싱에 있는 범죄자 중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이나 나와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라 생각하죠. 이들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왜 금고를 텅 수밖에 없었는지, 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오류투성이이고, 때론 합리적인 나름의 논리를 동원해서 자신들의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그 행위의 정당성을 이해시키려 합니다. 결론은 그들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어야 했다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왜 흉악범들까지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나아지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합리화입니다. 나아지려면 항상 지금의 나의 처지에 ‘근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베드로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또 물으시고 베드로는 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물으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어떠한 한 감정을 끌어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요한 21,17)

여기서 “슬퍼하며”라고 번역된 ‘뤼페오’란 단어는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태 19,22)에서 쓰였듯이, 어떠한 기준이 미치지 못할 때의 슬퍼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신있어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시는 사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픈 감정을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런데 뭐!’, ‘난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아!’라는 마음을 가지면 발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항상 부족하여 매일 나아지려는 삶을 살도록 종용하십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이 나쁜 사람이 된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개 우리에서 자란 옥사나 말라야가 개처럼 산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발전할 수 있는데 그 자리에만 머물려는 마음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신도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보다 못하면 못 했지 더 낫지는 않을걸요?”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어도, 감옥에 갇혔어도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 이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발전하려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읽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닮고 싶은 모델을 정해 나아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주라기 월드 등의 주인공인 ‘크리스 프랫’은 본래 스트리퍼였고 딱 먹을 만큼만 일하는 한량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였습니다. 식당에서 잠깐 아르바이트했는데 그 이유는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코만도의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레돈총이 혹시 연기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크리스는 연기를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런 건 아주 잘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자신감에 레돈총은 전화번호를 물어보았고 노숙 생활하던 그는 전화가 없어 친구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처음 출연한 영화는 질도 좋지 않았고 연기도 별로라 개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진작가가 우연히 그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서 그는 찍었고 당시 유명했던 히스 레저를 닮은 그는 드라마에 캐스팅되면서 천부적인 그의 재치로 점점 주연급 배우로 성장합니다. 나체로 여자들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 그는 팬티를 입고 등장해야 했는데 실제 나체로 등장해 배우들의 실제 반응을 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 관리에 실패하여 체중이 끊임없이 불었습니다. 어디서도 그를 캐스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단역에 출연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 훈련을 합니다. 그는 결혼도 하고 영화에서도 흥행 가도를 달립니다. 

그는 자꾸 스필버그 감독이 자신에게 쥬라기 공원 4에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해서 짜증 난다는 동영상을 장난삼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라기 월드의 주연을 꿰차며 공룡 하면 떠오르는 대표 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자기 아들을 생각하며 그는 소아병동에 들러 아픈 아이들을 많이 위로해주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사위가 됩니다. 

어떤 임금에게 멋진 매 한 쌍이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의 매는 잘 날았지만 다른 매는 나뭇가지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나중에 그 매를 날게 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도 그 새를 날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왔다 가더니 그 새가 날게 된 것입니다. 임금이 어떻게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농부가 대답하였습니다. 

“가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여기서 만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나의 자리에 있는 것을 근심하십시오. 안주하려는 마음, 이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근심하게 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행복이다.

 

많은 이가 인생의 가치를 행복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면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하고,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꼭 가진 것을 늘려야 행복할까요? 
 
가진 것을 늘릴수록 필요한 것이 또 원하는 것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 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먹고 살 정도가 되면 ‘조금만 더’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행복이다.” 
 
가진 것을 늘리는 삶이 아닌, 원하는 것을 줄이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원하는 것을 줄이는 삶은 남과 비교하지 않게 하고, 적은 것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즉, 타인의 반응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며, 지금 보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위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원하는 삶을 줄이는 가난과 겸손, 그리고 조건 없이 나눠주는 사랑을 당신의 모범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라고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과 죽음을 말해주었을 때,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더 뛰어남을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의 사랑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 
 
전에는 남과 비교해서 더 뛰어남을 보이려고 했고, 또 자기 사랑이 어떠한지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려고 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습니다. 남과의 비교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주님 따르는 것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삶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보잘것없는 삶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직접 높여주시기에 가장 귀한 삶이 됩니다. 
 
세상의 원하는 것들을 줄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도한 일이 실패해도 경험은 남아 다른 일을 할 때 도움이 된다. 무언가를 해 보려면, 씨앗이 껍질을 뚫고 나오듯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 우종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하느님 사랑을 정말 모르고 살았다. 혼돈에서 깨어나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 우리 삶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다. 삶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이다. 

우리들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다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랑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다.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에서 공동체 의식은 자라고 확립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 사랑의 질서가 있다. 사랑의 기초는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양들과 목자는 서로를 성장시키는 상생의 관계이다. 참된 사랑으로 공동체적 삶의 길을 보여주시는 주님이시다. 

벗겨내고 버리는 거짓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며 신앙 공동체의 사랑이다. 해야만 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돌보고 있다. 사랑을 철들게 하시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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