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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6주간 금요일 -
2022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코린토에서 선교하다가 시리아로 떠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근심이 어떻게 기쁨으로 바뀔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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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말씀이신 성자께서 하신 거룩한 약속이 복음 전파로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모든 자녀가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6장 20-23ㄱ절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하상헌 윤호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5월 27일 (금)
하상헌 윤호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 근처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의 말[馬]이 까닭 없이 도망을 쳐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끼던 말을 잃은 그 노인을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다시 노인에게 돌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그는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화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많은 오랑캐가 한꺼번에 침입해 오자 마을의 장정들이 이에 맞서 싸우다 열의 아홉은 전사합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처럼 우리 삶의 길흉화복은 늘 변화가 많아 예측할 수도 예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한 여인이 해산의 진통을 이겨 낸 뒤에야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내맡겨 봅시다. 주님께서 분명 그 모든 근심을 새로운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없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하여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일반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여기 국밥집과 특별히 예약하신 분들이 미사도 드리고 저와 식사도 같이하는 여기 밥상도 하지요.
그런데 지난주와 어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여기 밥상을 했는데 코로나로 대면 만남을 못한 분들이 만나서 그런지 그분들끼리 너무나 신나게 얘기를 하시는 거였고 그래서 식사 내내 저는 그분들 얘기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도 식사를 하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열여덟 분이나 식사를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제는 일곱 분뿐이었는데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실 때가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듯 우리끼리만 대화를 재밌게 나누면 그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겠지요?
그런데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안 계시는 것 말입니다.
너무 맛있어서 먹는 데 열중하다 보면 식탁에 주님이 안 계시고, 오래간만에 실컷 수다를 떨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그 대화에 주님이 안 계시고, 오랫동안 힘들게 해오던 일을 마침내 끝내고 나니 그 성취감으로 인한 기쁨이 대단하기는 한데 그 기쁨에 주님이 안 계십니다.
그래서 어제 기쁨을 낳는 생산적인 근심과 주님을 만나는 신앙적인 근심을 봤듯이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기쁨에는 자기 성취적인 기쁨이 있지요. 대학에 들어가고, 시험에 붙고,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의 기쁨 말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한 차원 높은 기쁨으로서 깨달음의 기쁨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도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기쁨은 오늘 주님께서 예를 드셨듯이 아이를 낳는 기쁨처럼 인격적인 기쁨이면 더 좋을 것이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낳는 기쁨이면 더욱더 좋을 것이며, 그래야 우리는 신앙적이고 그 기쁨은 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쁨만 그런 것이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어제 봤듯이 근심도 그런 것이어야 하고,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두려움도 그런 것이어야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두려움이 없을 것 같은 바오로 사도도 두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나 봅니다.
이에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당신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의 두려움은 주님께서 아니 계시는 두려움이었고, 사실 우리의 많은 두려움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 계시는 두려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두려웠던 것은 코린토 사람들이 아니라 코린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이었듯이 우리의 많은 두려움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느님 없이 먹고 마시고, 하느님 없이 대화하고 친교나누고, 하느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느님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쁨의 씨앗 : 희망하는 고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다시 보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관상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이 느끼는 근심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평화를 빼앗겼을 때 가지는 근심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잃는 고통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이 보이지 않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다시 부모를 잃은 고통과 같은 어둠을 견뎌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만나 자신이 인간이고 부모처럼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이 근원적인 불안을 잘 표현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로봇입니다. ‘하비’ 박사는 죽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은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한 가정에 입양시킵니다. 그 가정의 아이는 몸이 아파서 의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냉동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엄마 ‘모니카’는 로봇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동화를 읽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동화를 듣고는 자신도 ‘푸른 요정’을 만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냉동상태로 있던 모니카의 아들 ‘마틴’이 치료되어 돌아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데이빗이 마틴처럼 자기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데이빗을 산에 버립니다. 회사로 돌려주었다가는 데이빗이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푸른 요정을 만나 꼭 인간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모니카는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진짜 아들인 마틴을 위해 데이빗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인간 사회를 방황하지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로봇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공지능 로봇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 불안한 세상에서 간신히 ‘조’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으로 자신을 만든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을 친절히 맞아줍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하비 박사가 자신과 똑같은 로봇을 이미 수십 개, 수백 개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아버지 하비 박사를 통해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푸른 요정을 만납니다. 비록 동상이기는 했지만, 그 요정에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2천 년이 지납니다. 지구는 멸망하여 더는 인간이 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데이빗의 기억을 보고 그가 인간이 되고 싶어 2천 년 동안 푸른 요정 앞에서 청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외계인들은 그도 인간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 모니카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기억을 넣어줍니다. 데이빗은 이제 엄마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엄마 품에 잠이 듭니다.
데이빗은 로봇이면서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희망은 먼저 인간이 희망해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데이빗은 희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에 의해 정말 인간이 되는 꿈을 꿉니다. 데이빗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은 원한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큰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지닌 이가 먼저 믿어주고 희망해주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들이 그렇게 하였고 그들만큼 자랐고 개들만큼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죽음을 이기시게 해 주시어 우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예수님은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당신이 인간이 되셨고 부활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자기의 짧은 오른팔을 뻗어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만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랑 똑같구나!”
키릴의 근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성장하여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손자로 받아 준 할아버지도 자신처럼 한쪽 팔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릴에게 한 집안으로 입양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모험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자기를 새 부모가 사랑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자신을 그들과 같은 모습임을 보여줄 때는 기쁨에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모습을 한 부모님은 하느님께 안기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근심과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다 보면 키릴처럼 기쁨을 맛볼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믿음과 의지입니다. 키릴은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온전히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수준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실 희망은 고통스럽습니다. 도파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항상 더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께서 이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시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희망하게 합니다. 믿게 합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죽음도 두렵지 않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기쁨은 바로 이 성령을 받는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며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수준의 존재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오시면 어린 저를 보고는 꼭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그때는 되고 싶은 모습이 너무 많았습니다. 과학자, 의사, 판사, 대통령, 경찰, 소방관…. 그래서 매번 다른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그중에 하나는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이렇게 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신부가 되기 전, 신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글을 매일 같이 쓰고 또 책도 출판하리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어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신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 특수 사목 신부로 오랫동안 살지도 몰랐습니다.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재주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하는 강사 신부가 되었습니다.
미래는 자기가 생각한 데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의 뜻에 따라 지금의 내 모습이 된 것이 된 것이 아닐까요?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주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내 모습이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노력을 통해 주님 계획이 더 빨리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분명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주님의 패배에 기뻐하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처럼 보여도 결국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 편이 되어 주님 계획에 동참해야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이 기쁨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시련 후에야 부활의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아픔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승리의 주님이시기에 주님과 함께라면 분명히 승리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계획에 철저히 동참하는 주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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