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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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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

 

 

2022년 5월 26일 (목)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면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환호할 것이고, 제자들은 근심하겠지만 그 근심은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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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충실한 종들을 성덕의 영광으로 끊임없이 들어 높이시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복된 필립보의 마음을 신비롭게 채우신 그 성령의 불꽃으로 저희 마음도 불타오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6장 16-20절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정원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5월 26일 (목)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김정원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6일 (목)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던 필립보 네리 사제

 

제게는 유학 시절에 만난 폴란드인 친구 신부가 있습니다. 방학이 되면 가끔 그 친구 신부의 고향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주일이 되면 그곳 본당에 가서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신부가 미사를 주례하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미사가 생기가 넘치고 즐거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비결은 간단하였습니다. 미사 시작 때 한 번, 강론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견에서 다시 한번 신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 말이어서 무슨 이야기로 신자들을 그렇게 웃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미사에 참석한 모든 신자가 그 신부의 이야기에 큰 소리로 웃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필립보 네리 사제는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과 고해 사제로 명성이 대단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쾌활한 성격과 유머로 사람들을 웃게 하고, 그 웃음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한 분이었습니다.

가끔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신앙생활을 경건하고 엄숙한 것으로만 여기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특별히 미사 때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고, 실수한 사람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이미 일어난 실수라면 너그럽게 웃고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실수를 엄한 얼굴이 아니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던 필립보 네리 사제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생활도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웃음이 가득하도록, 밝게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은 우리 인간이 모두 가장 원하는 감정 상태입니다. 즐거움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금세 사라지는 데 비해 기쁨은 여운이 길기 때문이고, 쾌락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닌 것처럼 즐거움은 퇴폐적으로 흘러 인생을 망치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는 허무감만 남기기 일수입니다. 그에 비해서 기쁨은 남는 것이 있지요. 감정에 여운이 있는 것은 물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얻음의 만족감, 성취의 만족감, 성공의 만족감, 만남의 만족감입니다. 

집을 얻거나 자식을 얻었을 때 기쁘고, 원하던 목표를 성취했을 때 기쁘며, 사업이 성공하고 번창할 때 기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대가가 즐거움 뒤의 허무감이나 피폐함이라면 기쁨의 대가는 기쁨을 얻기 전에 치러야 하는 것으로서 고통이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즐거움의 후 대가이고 기쁨은 전 대가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서 삶의 지혜, 기쁨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기쁨을 위한 근심과 걱정으로 바꾸고, 기쁨을 위해서 근심과 걱정을 마다하지 않는 지혜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과 비생산적인 근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것입니까? 

예를 들어, 주님께서 예를 드신 바 있지만, 아기를 낳기 전의 근심, 아기를 낳기 위한 근심은 생산적인 근심이요 기쁨을 낳는 근심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우(杞憂) 같은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근심입니다. 

기우란 하늘이 꺼질까 근심했다는 옛날 기나라 사람의 근심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의 근심대로 하늘이 꺼졌다면 근심했는데도 꺼졌으니 쓸데없이 근심한 것이요. 꺼지지 않았다면 꺼지지 않을 것을 근심했으니 이 또한 쓸데없이 근심한 거지요. 근심하여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의 병만 얻고 건강은 잃은 셈입니다. 

이제 우환(憂患)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환이란 근심스러운 일을 말하고 그중에서도 병으로 인한 근심을 말하는데 우환이 생기면 누구나 처음에는 근심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람은 생산적인 근심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쓸데없이 근심만 합니다. 

그제 우연히 생로병사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파킨슨씨 병을 앓는 사람들 얘기를 봤는데 거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가 이내 극복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특히 춤을 추면서 마음을 밝게 가지려고 했더니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행복을 되찾았답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우는 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요. 하느님을 만나서 병이 치유되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지만 설혹 병이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만난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근심이 있다면 이런 생산적인 근심으로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근심을 바꾸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의 공포가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은총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받아 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성령 강림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바로 ‘근심’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세상이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근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이시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합니다. 이 근심이 있어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어머니는 근심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없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기쁨을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피 흘리는 고통, 곧 죽음에 대한 근심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불안 때문에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커지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이 불안을 없앱니다. 아니 없앴다고 착각합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다시 그 불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믿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광야’로 여기지만 사실은 주님을 찾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세 명밖에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사울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불안해 하느님께 자신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십니다. 

다윗은 ‘육욕’ 때문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한 그가 자기 아들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겪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다윗이 뛰어난 왕인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겪게 된 광야의 삶에서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혼인하고 그도 이방신 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재물은 이렇게 그에게 또 다른 신이 되었고, 그 결과는 아들에게 온전한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고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먹고살 것이 충분할 때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부러라도 근심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죄를 짓는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로 죽음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이 불안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불안이 돈이 부족해서라 여기고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이기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부활하신 당신을 만남으로써만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불안함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불안함을 주님만을 희망하게 하는 재료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탐욕-육욕-명예욕으로 이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 못하게 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광야’의 불안에 속하게 해야 합니다. 광야는 당장 내일을 알 수가 없어 탐욕을 부릴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을 수도 없으며 성공하려는 욕망도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광야의 시기를 짧게 재연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하여 배가 고프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근심이 듭니다. 단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근심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잎새』라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날로 병세가 악화하여 갑니다. 이 사람은 삶을 포기한 채 창밖에 있는 담쟁이넝쿨의 이파리만 세면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화가 지망생이 사는 집 아래층에는 가난한 노인 화가 베어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꿈이 있지만 현실은 그저 싸구려 광고물이나 그리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화가 지망생이 어느 날 창문을 바라보니 담쟁이 잎새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보니 그 마지막 잎새가 담벼락에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자 이 처녀는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두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잎새도 저렇게 버티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의사가 이 처녀의 완쾌를 알려주던 날, 그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진짜가 아니라 아래층에 사는 노인 화가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그린 그 노인은 그림을 마친 그날 밤 폐렴을 얻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의지해서 내가 생명의 주체가 되려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시는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이 무시하던 술주정뱅이 할아버지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죽음 앞에 그렇게 머물지 못했다면 참 생명이 자기 집 아래 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죽음 때문에 근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와 부활이 참 생명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차도록 매일 죽음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오시는 분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변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 심각한 교통체증 속에서 당신은 끝까지 침착할 수 있는가? 
 
- 이웃이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 주변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가? 
 
- 지금 있는 곳에서 늘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가? 
 

책에서는 이 네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질문을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이 질문들에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목적지가 아니라,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방향을 잘 잡아야 내 변화의 모습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에 쉽게 빠지고 사랑의 삶을 잘 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그 변화를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요구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드시고 십자가 죽음이 임박하셨을 때 하신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당신의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평화를 주시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기쁨도 전해주십니다. ‘조금 더 있으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세상 마칠 때까지 예수님의 현존이 믿음의 삶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사람은 악의 세력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죄의 그늘에 있는 사람과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기쁨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또 세상을 사는 것이 쉽고 편한 삶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지요. 그때 근심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믿음의 힘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은 어떨까요?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의지를 계속해서 내세워야 합니다. 완벽함은 가능하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로 향한 우리의 변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똑똑한 자는 자기가 어리석음을 안다.

- 윌리엄 세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 20)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이다. 참된 기쁨이 우리들 사이에 탄생한다. 가장 좋은 위로와 위안을 주님께서 주신다.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마냥 지나간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 체험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알 수 없는 삶의 이 여정이다. 우리들 어리석음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 근심도 기쁨도 하느님을 향해 이 모든 것을 기도로 봉헌한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근심도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다. 인내를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인내가 길을 낸다. 조금 더 견디어 내면 근심은 이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끝까지 희망을 지켜내시는 주님이시다. 헛된 희망이 아니라 견디어 낸 희망이며 기쁨이다. 쓰러진 십자가가 다시 일어나고 가장 아팠고 가장 어두웠던 일이 주님을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이 될 것이다.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감사의 시간이다. 가장 좋은 은총은 감사하는 지금이다. 희망하고 믿는 지금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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