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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2022년 5월 18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 1독서에서는 할례 문제를 두고 공동체에서 분쟁과 논란이 생기자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여 논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그러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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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하느님 종들의 마음을 이끄시어 불신의 어둠에서 벗어난 그들이 언제나 진리의 빛을 따르게 하소서.
복음
요한 15장 1-8절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진호 세례자 신부 집전
2022년 5월 18일 (수)
최진호 세례자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8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식물을 사랑한다면 가위를 드세요.
제 방에는 화분이 많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식물 키우는 것이 즐거워지더니, 하나씩 구입한 화분과 또 분갈이를 하면서 늘어난 화분이 모여 지금은 50개가 넘게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함께 있는 제 반려 식물들은 거실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분이 많다 보니 물을 주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리고, 오랜 시간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동안 녀석들이 말라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생각하지 못한 때 새롭게 돋아나는 잎들을 보는 기쁨과, 때로는 작고 앙증맞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는 신기함으로 어느 화분 하나 허투루 대하지 못하고 애지중지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식물 키우기에 관한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하였습니다.
“식물을 사랑한다면 가위를 드세요. 식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톱을 드셔야 합니다.”
처음엔 이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파리 하나만 시들어도 마음이 아프고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가위를 들라는 말인지.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제대로 식물을 성장시키고 또 예쁜 모양을 지닌 건강한 식물로 키워 내려면 과감히 가위와 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필요 없는 가지들을 쳐 내는 일이, 가지들 사이에 숨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일이 식물의 건강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여기에서 ‘가지를 깨끗이 손질하다.’라는 말은 다름 아닌 ‘가지치기를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과감히 가위와 톱을 들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독은 살되 고립은 살지 않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늘 들어 이제껏 저를 애타게 하는 비유 중 하나이고 그래서그 비유의 뜻을 꼭 그리고 다 깨닫고 싶은 비유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30분 이상 묵상을 하였지만 그 뜻을 다 깨달았다는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고 그래서 고독과 고립의 관점에서만 이 비유를 톺아봤습니다.
저의 인식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독은 살되 고립은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독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고, 고독 중에서도 상대적인 고독이 아니라 절대적인 고독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제게 있습니다.
무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라는 숫타니파타 경전의 경구처럼 우리가 절대 고독을 살 수 있으면 상대적인 고독을 우리는 초월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경우든 홀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없고,
사랑이 있고 없고,
고통이 있고 없고,
칭찬이 있고 없고,
재물이 있고 없고,
권력이 있고 없고에 매이지 않고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고 홀로 갈 수 있는데 이럴 수 있는 것이 절대 고독이고 그 반대가 상대적인 고독이겠습니다. 물론 숫타니파타에는 절대 고독이니 상대적인 고독이니 그런 표현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고하시라고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불교의 답은 역시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되는 방식입니다.
부처란 사람이 옆에 있건 없건 인간은 본래 혼자라는 그 절대 고독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이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겐 사람이 많은데 내게는 없는 상대적인 고독을, 젊었을 때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없는 상대적인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요.
고독이 두려워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고통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지 않지요. 그러니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 곧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반대로 고독이 두려워 사람에 매이면서도 고통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는 단절과 고립의 삶을 살게 되겠지요.
이것이 불교의 방식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방식입니다. 불교가 하느님처럼 되는 방식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방식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만 계시면 누구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의존하지도 않을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고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으며,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인데 나는? 우리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수액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불 속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나라라는 포도밭에 머물려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나라로 말하면 ‘세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치사하게 세금을 내야 당신 나라에 살게 해 주시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세상이나 세금은 존재합니다. 세금은 그 공동체를 운영하는 비용입니다. 세금을 걷지 않고 운영될 수 있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다만 세금을 강제로 내게 하느냐, 자의로 내게 하느냐가 다릅니다. 자기 자유로 스스로 세금을 내게 하는 사회를 공동체라 합니다. 더 가족적인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자의적으로 세금을 내게 할까요? 양심을 통해서입니다. 그 공동체의 주인이 먼저 그 공동체를 위해 피땀을 흘려 그 자녀들이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 세계 1위 부자가 된 일론 머스크는 추정 자산이 215조 원이라고 합니다. 무일푼 대학생이 어떻게 이런 큰 부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세금을 잘 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면서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학교 폭력의 희생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학교에서 날 때리려고 했던 갱들(동창생들)에게 쫓기고 집으로 돌아와도 그 곳 역시 끔찍했습니다.”
어느 날은 또 애들이 머스크를 계단에서 밀어버립니다. 그리고 넘어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걷어차고 또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얼마나 심했냐면 아버지가 병원에 왔는데, 아들을 못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론 머스크의 아버지 또한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고 가정에서도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가 사는 세상은 한 마디로 지옥이었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무슨 세금을 내고 싶겠습니까?
이런 자녀 셋을 키워낸 어머니가 ‘메이 머스크’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캐나다로 옵니다. 파산하여 돈이 하나도 없는 그녀는 모델, 영양사, 강사 등 대여섯 가지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법니다. 메이 머스크는 그렇게 일하면서도 캐나다 명문 토론토 대학에서 석사 학위도 취득합니다. 이 모습을 보는 자녀들은 놀고먹을 수가 없습니다.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자녀 셋도 모두 명문대를 갑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억만장자를 키워낸 비결에 관해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을 단 한 번도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사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그 좋은 스탠퍼드 대학 박사학위를 때려치우고 공부 잘하던 동생과 함께 땡전 한 푼 없으면서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어땠을까요?
흔쾌히 허락하였습니다. 오히려 명문대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길을 가려는 아이들을 지지합니다.
일론 머스크가 항상 잘 됐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직원들은 그를 믿고 월급도 받지 않으며 일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장이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욕을 먹어가며 투자를 유치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란 믿음으로 세금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테슬라와 스페이스 엑스가 있는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바로 세상이 자신을 받아주고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학교에도 가정에도 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입니다. 지금 세상이 그를 살게 합니다. 그러니 그는 목숨을 바쳐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세금을 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며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욕심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곧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에 살 자격이 있는지 연습합니다. 벌써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선교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유퀴즈에 옥효진 초등학교 선생님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옥 선생은 자신의 반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아이들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직업을 선택하게 합니다. 경찰, 은행원, 도매업체, 국세청, 급식 도우미 등 다양한 직업이 있고 그 직업에 따라 월급도 다르고 세금도 냅니다.
투자도 할 수 있습니다. 옥 선생은 자신의 몸무게를 주식처럼 여겨 저축을 할 수도 있지만 투자도 하게 합니다. 잔치가 있거나 놀러 가는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돈을 불리기 위해 투자를 늘립니다.
아이들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역할이든지 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벌어 살아갈 수 있음을 배웁니다.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 이 학급에서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릿값, 곧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방역 요원으로 돈을 벌던 한 아이는 학급에 자동 손 소독 기계가 설치되면서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아이는 “그 나쁜 기계가 나와서 제 직업을 잃었습니다”라고 한탄합니다. 선생님이 “그러면 기계를 없앨까?”라고 묻고 아이는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새 직업을 찾아봐야죠”라고 말하며 산업혁명이나 코로나로 인해 겪은 어른들의 문제를 고스란히 겪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와, 이 선생님은 아이들을 어른으로 대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유대인 교육법과 비슷하다’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살 연습을 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분명 세금이 있습니다.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포도를 맺어 세금을 내야 포도밭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십일조와 선교입니다. 하느님 나라 유지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당신 나라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나라 백성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해주는 것입니다. 메이 머스크나 옥 선생은 아이들을 이미 성인 대하듯이 대합니다. 아이들을 아이 취급하면 아이는 영원히 아이로 머물 뿐입니다. 세금을 낼 수 있는 어른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런 영혼을 많이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정의 연쇄현상.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속도에 우리는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됩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전염 속도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감정의 감염입니다.
걷어차인 고양이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중간 간부가 사장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채 자기 사무실에 들어왔고, 자기 밑의 부하 직원에게 사소한 것을 두고서 한바탕 화를 냈습니다. 이 부하 직원도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별것 아닌 이유로 화를 냈고, 억울한 아내는 침대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혼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옆에서 뒹굴고 있는 고양이를 발로 찼습니다.
감정의 전염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감정의 연쇄 현상은 우리 삶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감정이 돌고 돌아 내게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쁜 감정의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쁜 감정을 끊어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좋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쁜 감정을 끊어 버리고 대신 좋은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의 모습입니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는 열매를 많이 맺도록 2, 3월에 쓸모없는 가지를 쳐 냅니다. 8월이 되면 농부는 두 번째 손질하면서 돋아난 새싹들을 살피고 싹수가 노란 것은 따 버립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지의 역할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쳐 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이기에 우리가 좋은 가지가 된다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가 되어야 사랑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참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인 우리는 절대로 나쁜 감정의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에 집중해서 사랑을 세상에 전달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짧지 않다. 다만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무의미하게 쓰고 있을 뿐이다.
- 세네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요한 15, 5)
머무름의 길이 서로를 살리는 나눔의 길이다. 주님께 머무르지 않고서는 참된 믿음의 탄생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열매는 열매를 맺는 그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열매와의 만남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만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이다.
만남의 깊이는 머무름의 깊이이다. 머무르지 않으면 금방 시들해지는 만남의 생명이다. 삶이란 혼자만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베풀어주시는 은총이 너무 크다.
생명을 위해 생명이 되어오신 주님이시다.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들 몫이다. 붙어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누구나 아는 머무름의 진리를 우리만 모른 척 살아간다. 머무름의 사랑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다.
기다림의 열매도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하다. 포도나무도 사람을 키우는 자식농사도 오랜 정성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참다운 나무와 참다운 가지의 생생한 관계처럼 참다움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머무름과 이어짐 사이에 사랑보다 뜨거운 세월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머무름과 마주함이다. 이렇듯 나누지 않고서는 어울릴 수 없고 어울리지 않고서는 열릴 수 없다. 머무름은 열림의 가득한 신비이다. 머무름이 한 평생이며 주님의 간절한 뜻이다. 머무름의 길을 오늘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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