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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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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2022년 5월 14일 (토)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마티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사도로 뽑혀 사도직을 넘겨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면 당신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그 계명을 실천하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4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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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5장 9-17절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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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4일 (토)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유다의 자리를 마티아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성경 어디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복음서 밖에서도 그에 관한 전승은 매우 빈약하여 그가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반자였던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마티아 사도가 거론될 때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다른 사람의 자리를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임자가 훌륭할 경우 그의 위업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마티아 사도처럼 전임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의 흔적과 어두움을 지워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간다면 어느새 과거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지 않을까요?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봅시다.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며 턱없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늘 충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자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 있고 또 앞으로 서게 될 모든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나아가 세상의 빛이요 희망으로서 참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의미상실의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아시다시피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로 사도가 된 분이기에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뽑은 것이라는 복음을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의 복음으로 교회 전례는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뽑으신 거라는 말씀은 마티아 사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뽑힌 것이 로또에 당첨되듯이 행운입니까? 아니면 지독한 불운이고 재수가 없어서 뽑힌 것입니까? 

어렸을 때 저에게는 소중한 체험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어 돈도 없고 키도 작고 힘도 없는 저를 인정해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한테만 잘해 주신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선생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 선생님은 저에게 일을 자주 시키셨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쌀 때 '찬선이 남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남으면 그날 시험 본 것의 채점을 저에게 맡기시곤 하셨는데 그것을 하다 보면 동무들과 놀 수 없는데도 저는 그것이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웠습니다. 

저를 부려먹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빼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평의원 선출을 하면 대부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직책과 책임을 맡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그 일의 적합자로 인정하시고 무엇보다 사랑하신 거라고 생각하기보다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만 부르시고 뽑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은 종이요 일꾼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이렇게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살라고 하시는데 사랑의 기쁨과 행복의 성소를 살지 못하고 일꾼의 성소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않기에 불행하고 죽으라 일만 하기 때문에 지칩니다. 

수도자들을 보면 사랑의 성소에 실패하여 얼굴에 그늘이 있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자녀의 사랑이라도 있어서 작은 행복이 있는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 실패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도 실패한 수도자들은 기쁨과 행복을 사랑 안에서 찾지 못하고 일의 보람에서 찾으려다가 그리된 겁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의 보람을 얻기 위해 일을 했는데 보람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성소에 실패할 경우 초기에는 의미를 찾지 못해 실패하는 데 비해 나이를 먹어서 수도원을 떠나는 것은 의미를 잃기 때문인데 왜 의미를 잃겠습니까? 

사랑을 잃으면 의미를 잃는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어쩌면 이런 '의미 상실의 실패'를 한 것이 아닐까요? 

그에 비해 그의 자리를 이은 마티아 사도는 길이 남을 열매를 맺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의 축일을 지내며 사랑의 성소를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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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계십니까?

 

우리 인간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죽는다’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 역시 ‘죽는다’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은 아무것도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야기가 남기 때문입니다. 삶에 관한 이야기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 웃고 울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삶을 이룬 이야기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단순히 이야기의 끝인 죽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만드는 좋은 이야기 만들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 특히 인기 있으며 화제성을 가져오는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내용입니다. 이런 특별한 내용에 사람들은 더 큰 사랑을 보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서 내리신 사랑의 계명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결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훨씬 손쉽게 됩니다. 지금은 사랑의 실천에 어려움을 느끼고 힘들다고 한숨을 내쉴 수도 있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만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얽히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훌륭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리더는 혼란에서 단순함을, 불화에서 조화를,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 17)

 

서로 사랑하는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서로를 알고 있는 것보다 서로를 더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다. 모든 복음은 서로 사랑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서로 사랑하는 여정이 참된 사랑의 여정이다. 비뚤어진 사랑을 치유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이다. 

사랑은 직면에서 더 깊어진다. 오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자아에 갇혀 있지 않으며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내놓지 않고서는 사랑에 머무를 수 없고 충만할 수 없다. 

사랑하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는 실천이 있다. 사랑의 실천이 사랑의 참된 열매이다. 사랑으로 청하면 사랑으로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사랑의 안과 밖도 사랑이듯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되는 사랑의 기도이다. 

마티아를 사도로 새로 다시 뽑으시는 사랑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사랑의 새로운 실천이며 모두를 다시 살게하는 충만한 교회의 기쁨이다. 서로 사랑하는 기쁨이 가장 큰 하느님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친구가 되게 하는 사랑의 참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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