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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간 목요일 -
2022년 5월 12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과 사명 수행은 당신의 파견과 사명 수행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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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13장 16-20절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2022년 5월 12일 (목)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 가운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고 또 그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호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본디 ‘파견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어떤 사명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사람은 모두 사도가 됩니다. 이런 의미의 단어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파견된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4장 14절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불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사도로 파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마지막에 선포되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자, 이제 파견입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받아 모셨으니, 이제 세상에 나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파견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증언할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다시 하느님의 사도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의 사명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 일임을 기억합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받아들임에 대하여
어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맞아들이고 받아들임에 대하여 두루 성찰하고자 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갈수록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만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왜 갈수록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어갈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성의 시대를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감성의 시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중에서 곧 이성과 의지와 감성 중에서 감성에 더 의존하고, 다른 것들보다 더 감성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감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좋고 싫은 감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람은 아무리 싫어도 의지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하며 살고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데 비해 감성적인 사람은 자기가 좋아야지만 하고 아무리 옳아도 또 아무리 다른 사람이 원해도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성의 시대인 오늘날, 좋다느니, 완전 좋다느니 그런 표현이 많고, 아무리 어른이나 집단이 원해도 싫다는 말을 너무도 쉽고 당당하게 하여 이전 세대의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부할 수밖에 없고, 좋고 싫은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싫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며칠 전에 엄마와 아들이 저의 식당에 오셨는데 저희 실수로 음식이 그분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맛 없어도 아깝다고 다 먹고 아들은 조금 먹어보고는 거지반 남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음식값을 받지 않겠다고 돌려드리니 자식은 받아 가려는데 엄마는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굳이 돈을 내고 가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도 감성적인 사람이었고 회개하기 전에는 싫은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환우를 피해다닐 정도였는데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한 다음에는 나환우를 받아들였으며 이때 그는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그리고 세속을 떠났다고 유언에서 회고하지요.
사랑이 없고 자기가 강한 사람이 싫고 좋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며 좋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은 사람은 강하게 거부합니다. 싫은 일도 사랑으로 하고 싫은 사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싫고 좋음이 없고 설사 싫은 것이 아직 있어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 까닭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자녀들 곧 자기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이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사랑 까닭에 주신 것으로 모두 다 받아들일 것입니다.
고통과 고통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일 것이며 마침내 죽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것으로 그리고 자매와 형제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의 길 : 발을 씻어주되 먼저 하느님이 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란 약속을 해 주십니다. 행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낮아짐’이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여인은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무더위 속에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 입과 눈과 음식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뱀과 도마뱀이 우글거리지만, 주위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울증에 걸린 그녀는 고향 부모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차리라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정말 지옥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이 단 두 줄만 적혀있었습니다.
“감옥 문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두 죄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는 흙탕길을 본다.”
이 두 줄의 글을 받아들인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꺼리던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었고 공예품 만드는 기술과 멍석 짜기도 배웠습니다. 사막의 식물들도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막의 저녁노을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성벽』(Bright Ramparts)이란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델마 톰슨(Thelma Thompson)은 말합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개미와 같은 존재가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지려면 먼저 높아져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잘 대해줄 때 기쁜 이유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 방법으로 낮아져야 함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엔 성찬례 제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성찬례의 의미를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삶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삶이 되지 못하면 성체의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성체는 내가 양식이 되어주며 상대도 자신보다 높을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면 상대가 교만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겸손해집니다. 내가 상대를 겸손하게 하려고 찍어누르려 하면 상대는 교만해집니다. 당장은 겸손한 척하겠지만 뒤에서 칼을 갑니다. 상대를 겸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를 한없이 들어올려야 합니다. 이 방법이 상대를 자신보다 이미 높은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낮아져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학자, 혹은 이적 엄마라고 많이 불린다는 자녀교육 멘토 ‘박혜란 작가’가 자녀들에게 한 가장 많은 말은 “알아서 커라!”입니다. 박 작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보냈습니다. 현재 첫째는 건축학과 교수이고, 둘째 이적은 가수이며, 셋째는 방송국 드라마 PD를 하고 있습니다. 자식 농사 정말 잘 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비법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를 키우려 하지 마라. 이것이 비법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제가 키웠다면 아이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라며 웃습니다. 『믿는 만큼 자란 아이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어머니는 아이들을 그저 믿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언제 우리를 키웠다고 그런 책을 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언제 키웠다고 쓴다고 그러디? ‘난 너희들이 믿는 만큼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라고만 쓸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혜란 씨는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적 씨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희를 애들 대하듯이 잘 안 대했습니다.”
아이를 애들 대하듯이 대하면 아이는 크지 않습니다.
비가 갑자기 올 때도 다른 아이들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적 어머니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했을까요? 그는 뿌듯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어른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장난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런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한 번 젖으면 더는 안 젖는구나!”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고3 막내아들 도시락을 싸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형들은 대학생이니 늦게 일어나고 엄마는 외국에서의 삶으로 바쁘니 막내가 일찍 일어나 형들 먹을 밥을 해 놓고 자기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막내는 제가 고3인 것과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냐며 외국에 가서 일 보시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자신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믿어준다는 것이 바로 자녀를 이용하여 자기 만족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죽인 피 흘림인 것을 압니다. 이 피 흘림으로 자녀들의 자아의 발꿈치가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적(이동준) 씨가 중3 때 ‘엄마의 하루’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삐,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 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 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싱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되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엄마는 해 준 게 없다고 여기지만 자녀는 압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만큼 피를 흘리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진정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물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표징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하느님처럼 순결하고 거룩하고 능력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자녀들을 어른으로 대하고 믿어줄 때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하느님 대하듯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낮아지고 그 낮아짐으로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웃을 이미 하느님이 된 존재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정말 하느님이 되는지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믿어줌으로써 내가 피 흘리고 낮아지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니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웃을 하느님으로 대하며 자신도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성체의 삶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사람과 친한 사람은 평균 15% 더 행복해진다.
미국의 ‘프레이밍햄’ 연구가 적혀 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친한 사람은 평균 15% 더 행복해진다. 그 행복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친구의 친구도 10% 더 행복해지고, 그 사람들의 친구들은 6% 더 행복해진다. 세 관계에 걸쳐 이어지는 경이로운 전달이다.”
행복과 기쁨은 이렇게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곁으로 가기보다는 혼자 있으려고만 합니다. 불행의 마음이 자기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행복한 사람들은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을 나눠서 그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줘야 합니다.
행복과 기쁨을 삶에서 느끼는 사람 곁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듭니다.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행복해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으로 절망의 상황만을 만들고 있으면 사람들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의 상황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 역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이 있다면, 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곁에 서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역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전,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토론했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는 이 발 씻김의 뜻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권력 지향적이어서는 안 되고, 솔선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삶으로 겸손을 보이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고, 자기 행복을 세상의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과거의 탓,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생은 호전된다.
- 웨인 다이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요한 13,18)
벚꽃잎이 떨어지니 아카시아 꽃잎도 떨어져 내린다. 피었다 떨어져 내리는 대자연의 속일 수 없는 질서이다. 우리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결코 속일 순 없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이 많다. 아집과 교만이 질서를 깨뜨린다.
주님의 빵을 먹던 우리가 주님의 빵을 배신한다. 관계 속의 질서처럼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파견과 배신 사이에 관계의 참주소가 있다. 이기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관계이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머무름의 깊이가 곧 관계의 깊이이다. 주님과의 머무름과 동행은 헷갈리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이다. 뽑힌 이들은 무엇으로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겠는가. 믿음이며 일치이다. 믿음과 일치는 예수님을 우리 생활에 맞아들이는 것이다.
뽑힌 이들을 살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관계의 질서이다. 질서는 높이보다 깊이이며 깊이보다 은총이다. 은총과 은총 사이에 빵도 있고 씻어주는 관계도 있고 보냄도 있고 맞아들임도 있다. 은총이 기막힌 믿음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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