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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1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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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간 화요일 -

 

 

2022년 5월 10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 교회로 보내는데, 그곳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신지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고 하시며 아버지와 당신께서는 하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10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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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0장 22-30절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2022년 5월 10일 (화)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1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절망해 본 적이 있나요?

 

깊은 좌절에 신음해 본 적이 있나요? 살다 보면 죽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따뜻하게 건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축 처진 어깨를 감싸 주는 누군가의 손길은, 우리가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바르나바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시 사울은 그동안 굳건하게 믿어 온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선포하는 이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변절자인 사울을 찾아 죽이려 하였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박해자였던 사울을 두려워하여 그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고향 타르수스에 칩거하며 어둠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를 바르나바가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빛과 희망의 세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바가 사울과 함께 일군 안티오키아 공동체 구성원들은 인류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우리의 신원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사울에게 위로와 용기의 손길을 건네 준 바르나바를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쟁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신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다. 신자들 자신이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쟁이'가 붙는 말은 뚜쟁이, 땜쟁이, 겁쟁이, 거짓말쟁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 높인 말이 아니고 반대로 약간 얕잡는 말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제가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예수밖에 없는 사람, 예수한테 꽂힌 사람으로 저를 여겨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진정 프란치스코처럼 예수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며칠 전 기도방에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앉은 자리 정면에 걸려있는 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저를 같은 눈높이에서 보시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보신다는 느낌이었고, 그때 저는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 싶다는, 예수님께 저의 여생을 바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그것은 묵상을 하기 전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를 읽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첼라노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매일 계속 조금씩 읽고 있는데 그날 저는 다음 구절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살아 본 형제들은 그가 매일 얼마나 끊임없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렸고, 성인의 말씀이 얼마나 감미롭고 부드러웠으며, 형제들과의 이야기가 얼마나 친절과 사랑이 담겨져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흘렀고,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물론 이런 묵상을 했다고 해서 한 번에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을 늘 달고 살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첼라노는 그래서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런 얘기도 한 적이 있지요. 

"계속 순종함으로써 육신도 기꺼이 따라오게 되었다. 습관은 흔히 천성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예수, 마리아"를 불렀고, 깜짝 놀랄 때도 "아이구머니"가 아니라 "아이구, 예수, 마리아"라고 하곤 했지요. 

묵주를 늘 손에 들고 다니고, "예수, 마리아"를 입버릇처럼 그리고 습관처럼 외고 다니면 저에게도 예수님이 저의 전신에 깃드심으로 저도 진정한 예수쟁이가 되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과 하나라고 믿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참 목자가 되기 위해 왜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는데,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그들은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 하였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으면 당연히 하느님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성전 봉헌 축제’날이라고 말합니다. 마카베오가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주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왜 굳이 이 날이라 말하는 것일까요? 성전은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지만, 또한 하느님의 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마치 목자처럼 양들을 자신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집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잃어가시면서까지 당신이 하느님이시라고 주장하셨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양들을 당신께로 이끌고 오라고 파견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처럼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여기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만들 수 없고 내가 하는 사죄경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여기면 어떨까요? 이때 나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권위,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가졌단 믿음은 그래서 교회가 가져야 할 꼭 필요한 믿음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의 공통점은 모두 암행어사 직을 수행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암행어사라고 하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인물이 ‘박문수’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박문수를 신으로 섬기며 아직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탐관오리들을 숙청하는 일은 물론 어사 박문수는 젊은 사람들의 혼례까지 해결해주고 다녔습니다. 한 가난한 집에 들렀을 때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뛰어 들어간 박문수는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부잣집 늙은 사람이 자기 아들의 신부를 빼앗아 가 다음 날 혼례를 올린다는 것입니다. 박문수는 하루만 참아달라고 하고 암행어사 출두합니다. 

또 부자 양반의 딸과 가난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는데, 그 부잣집 양반이 결혼을 불허하는 것은 물론 청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박문수는 그 부자 양반을 찾아가 딸을 그 청년과 혼인시키도록 하였고 재산을 절반을 그 청년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횡포처럼 보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혼인을 못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였습니다. 박문수는 이렇게 임금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 밖의 처녀로 나이가 많아 20~30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和氣)를 손상할 것입니다.”(영조실록, 1730년 12월 24일)

하지만 박문수가 위대한 인물일 수 있는 이유는 ‘임금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임금이면 가져야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영조까지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만한 것이 없으니 삼백 년 종사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국사를 물리치고 마음을 붙이려 하지 않으시니 장차 국가를 어떤 지경에 두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한 신하가 자신의 정치를 비난하는 것에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영조는 친필로 “쓸데 없는 비용을 삭감했다”라는 글을 써서 박문수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박문수는 이렇게 임금의 신임을 받아 갈수록 더욱 다른 신하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왜 서민만 무거운 세금을 감당해야 하느냐며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거둘 것을 건의했고, 나라와 양반 두 군데서 뜯어가는 세금에 백성이 굶주리니 신하들의 녹봉을 감하여 그것들이 백성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는 것마다 마음에 거슬렸던 노론파가 소론파에 속한 박문수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두는 일이 생겼습니다. 신하들의 마음도 신경을 써야 했던 영조는 그래도 박문수를 믿어 한 달만에 박문수를 다시 복귀시켰습니다. 

하지만 소론파가 역모를 꾸몄고 거기에 박문수도 가담했다는 노론파의 주장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30여 년간 영조를 목숨을 바쳐 섬겼던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 심문당하는 모욕을 당하였고 이 일이 있고 난 후 1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영조마저 처음에는 박문수를 믿지 않았고 박문수도 죄인이라 자청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영조실록, 1756년 4월 24일)

영조실록의 기록에 그는 이렇게 평가되어 있습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

[출처: ‘한국사전-박문수는 왜 암행어사의 전설이 됐나’,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그는 마치 자신이 임금인 것처럼 임금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또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임금의 흐트러진 마음까지도 바로잡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내가 임금이라면!’이란 생각하지 않고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아버지와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성전이고 아버지는 그 성전의 주인임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다만 성전도 그 안의 주인과 하나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고 그분이라 믿어야 그분 마음을 알게 되고 그분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파견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슈퍼맨이 지구의 사람들을 살리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인간의 후손이 아니라 다른 별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의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하며 아들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본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을 지구로 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임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의는 믿음에서 나온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집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미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역시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한집에 살면서 가장 미워하게 되는 곳이 집입니다. 실제로 가족은 가까워지기도 쉽지만 멀어지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는 집의 공통점은 말을 예쁘게 하고, 멀어져 지내는 집의 공통점은 말을 밉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깝고 소중한 가족인데 말조심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까우면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리니 자신도 모르게 속에 쌓여 있는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얌전한 사람이 집에서는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 폭발이 서로 일어나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제 더 큰 긴장의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서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없애는 따뜻한 예의를 통해, 긴장이 풀리는 편안한 관계를 가족 안에서 분명하게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사회 안에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대부분 예의 바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공을 우리 가정 안에서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남 대하듯 믿음이 담긴 예의를 가족에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면 주위의 적들을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선악을 가리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소문은 몹시 신경이 쓰였습니다. 로마의 점령하에 있던 현실에서 국가 안보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적대적인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직설적으로 밝히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직접 듣고 확증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심보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듣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정체가 보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서도 믿지 못했던 것은 적대적인 관계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편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과 가장 먼 사이가 되고 맙니다. 
 
예의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배척하는 예의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 앞으로 걸어가지 마라.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내 뒤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이끌지 않을 테니. 내 옆에서 걸으면서 친구가 되어다오.

- 알베르 까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30)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하나되는 일치이다. 일치의 신비로움은 위대한 사랑의 섭리이다. 일치에 집착하지 않기에 하나되는 일치로 화합을 이루신다.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이 참된 일치이다. 일치는 실천으로 깊어진다. 

실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현실적인 진리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공동체의 본질을 일깨워주신다. 수도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며 추구이다. 이 본질을 망각하면 일상적인 삶은 언제나 갈등이 되고 충돌이 되어 행복을 놓치고 잃어버린다. 

성숙한 관계가 하나되는 공동체적인 삶이다. 서로간에 존중과 존경이 있어야 일치로 이어지고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 일치의 첫걸음이다. 다시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되는 일치를 향하신다. 

일치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진실된 소통이다. 하나되는 일치 하나되는 소통 하나되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드린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묻고 실천하는 일치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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