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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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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4주일 -

 

 

2022년 5월 8일 (일) 성소주일, 부활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회당에 들어갔다가 박해를 받고 쫓겨나 이코니온으로 갑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큰 무리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양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들은 당신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며,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8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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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0장 27-30절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집전

 

 

2022년 5월 8일 (일)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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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유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 가득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 참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참포도나무이다.”(15,1 참조) 등. 이 수많은 자기 계시 가운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나는 착한 목자다.”(10,11)라는 선언에 뒤이어 나오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계시하시며 당신과 목자인 그분을 따르는 양들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 나눈 대화에서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5)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바치십니다. 착한 목자에 대한 담화 가운데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한 자신의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신 분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하여 그 신적 생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바치는 목자, 바로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분과의 관계성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의 정체성도 설명해 줍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자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와 수도 성소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모든 이가 받은 성소, 곧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부르심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이루어지는 성찬례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쉬울 것 없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오늘 부활 제4주일은 예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당신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선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저 그분의 목소리를 모르지 않는다는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목소리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이고, 둘의 관계는 대단한 사랑의 관계이며 특별한 관계, 아니 각별한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는 짐승이건 사람이건 어미와 새끼 간에 형성된 관계와 같습니다. 괭이 갈매기나 팽귄이 같은 시기에 새끼를 낳고 같이 키우는데도 어미와 새끼는 그 많은 새끼 중에 또 그 많은 어미 중에 헷갈리지 않고 서로의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어미는 자기 아이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봅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도열해 있어도 그중에서 자기 자식을 즉시 알아보는데 이것은 아비도 못하는 겁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저희 청원소에서 옛날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모셔 식사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도 가졌답니다. 

그때 자기 자식 알아맞추기 Blind test, 곧 눈가리고 맞추기를 했고 열몇 명의 청원자의 손만 만져보고 자기 아들을 알아맞추는 거였는데, 저는 그 얘기를 나중에 듣고 어찌 그런 위험한 게임을 했냐고, 당신 아들을 맞추지 못한 어머니가 계시면 어찌하려고 그랬냐고 나무랐는데 그것은 저의 기우였고 모든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알아맞추셨다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도 이처럼 특별한 애착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사랑의 관계일 뿐 아니라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양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곧바로 죽음이지요. 

그것은 목자와 떨어지지 않고 따르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일사후퇴 때 수많은 피난민에 섞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할 때 나를 부르는 부모의 소리를 알아듣고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와 같지요. 

양이 목자와 떨어지면 죽는 것이고 그러니 목자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귀로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눈으로는 목자를 놓치지 말고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목자를 외면해서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흘낏 봐서도 안 됩니다. 정면으로 봐야 하고 집중해서 봐야 놓치지 않고 따라 갈 수 있고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어 내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주의 깊게 바라보라는 뜻으로 Attendo 동사를 씁니다. 이는 영어의 Attention과 같은 뜻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정면으로 놓고 눈과 귀와 모든 감각과 온갖 주의를 다 기울여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고, 그래서 시편 22편처럼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풀밭으로 가 그분이 아쉬울 것 없이 차려주시는 상에서 그분이 술잔 가득히 따라주시는 술을 마시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손절 대상 1순위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와 관계를 지속하고 또 누구와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손절다가 결국 혼자 남겨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을 붙잡으려다 사람에 치여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의 주체를 나로 두기 때문입니다. 

‘금쪽상담소’에 모니카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니카 씨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책임져야 해서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더 깊어지는 사랑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모니카 씨가 태어날 때부터 아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아프셔서 모니카 씨와 외식 한번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아버지 마음을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모니카 씨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분명히 져 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관계의 지속과 끊음에 관한 판단이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위해 ‘파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세례받은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습니다. 파견받은 사람은 파견하는 대상이 보내는 바로 그 대상에게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파견할 때 파견받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대상에게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5,44-45)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관계에 대한 자세입니다. 파견받은 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파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하시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셨기에 아버지의 힘이 나를 통해 그가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질 때 나는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갖은 집착을 하다가 나만 피곤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모두를 책임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피해를 봅니다. 

소위 ‘종교개혁자’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란 인물이 있습니다. 한때 벼락으로 친구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습니다. 그는 살려만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온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철저한 고행 생활하였습니다. 

이때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교황과 교회가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닌 연옥벌을 면하게 해 주는 ‘대사’였습니다. 죄와 벌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 떨게 했던 죄책감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참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회도 탐욕에 눈이 거의 멀었을 때였기에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통해 주장을 펼쳤고 이것을 루터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이 됩니다. 만약 유대교와 개신교가 성경을 놓고 싸운다면 어떨까요?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두고 그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인지 아닌지, 개신교와 싸우면 어떨까요? 그 싸움도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데도, 교회가 루터의 생각에 말려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거부하는 루터에게 교회는 오히려 끌려다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루터는 그 논박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여 유럽에서 루터의 명성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교회가 세력이 너무 커진 루터를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루터가 하는 일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싸움은 승리하였고 현재의 개신교가 탄생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도 커집니다. 교회는 본인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가차 없이 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대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상대해 주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파견되었다면 굳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견하신 분은 파견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를 나간 이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들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결국엔 무력을 쓰고 학살하고 강제로 믿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님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보며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력하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무력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눈이 열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견받은 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다가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그들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나를 그리스도의 파견자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어차피 승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파견받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 장군을 가장 싸움이 치열한 곳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다른 군인들은 뒤로 빠지라고 몰래 일렀습니다. 이는 우리야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승리할 수 없는 곳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신다면 더는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데 마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산적 떼에게로 파견하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파견받는 것이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우리가 파견받아 만나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것처럼 “네가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며 떠나보내면 됩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그 파견에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질 곳에 파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마치 질 것처럼, 마치 관계를 잃을 것처럼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파견하시는 분은 파견받는 이와 하나이십니다. 그러니 관계의 맺고 끊음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알아보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되고 알아보지 못하면 떠나보내면 됩니다.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곳에만 파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분에게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인이 왜 이래?

 

‘후광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한두 가지 우수한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다른 특징도 모두 좋게 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족한 특성을 보여주면 그 사람의 다른 특징도 모두 나쁘게 평가합니다. 
 
이 효과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광고입니다. 광고의 모델은 거의 유명 연예인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 연예인입니다. 악인을 연기한 연예인보다 선한 사람 연기를 한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들이 과연 광고하는 물건을 잘 알까요? 그 물건을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어도 아주 좋은 상품인 것처럼 광고합니다. 그 연예인의 매력이 후광효과를 작용해서 광고하는 물건의 매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신앙인이 왜 이래?” 
 
결국 주님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앙인은 달라도 뭐가 달라.”라고 말하면서 주님께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 됩니다. 
 
나의 후광효과만으로도 주님을 세상에 잘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후광효과를 내 안에서 뿜어내고 있습니까?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각자의 성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어떤 이는 결혼 성소로, 누구는 사제 성소로, 또 수도 성소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각자의 성소를 생각하는 날인 것입니다. 주님을 잘 드러내는 우리가 되는 방법은 남들 보기에 잘 사는 것입니다. 나의 후광효과를 높여서 주님을 더 세상에 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악의 세력도 주님의 능력을 누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사람은 제일 안전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주님의 편에 철저하게 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저는 당신 편입니다.”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나의 후광효과를 더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분명히 더 잘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 C.F.블렌차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 27)

 

부르심의 발자국은 경청의 발자국이다. 하느님을 향했던 첫마음을 만나는 성소주일이다. 첫결심을 기억한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의 씨앗을 우리들 삶에 심어 놓으셨다. 여리고 떨렸던 성소의 첫시작이다. 부르심의 자리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부르심의 길이다. 성소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부르심의 회초리가 필요하다. 부르심은 언제나 현실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부르심의 현실은 선물이 될 수 없다. 부르심에 얼마나 가까워졌는 지를 되돌아 보게 된다. 

부르심의 참맛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성소의 항구함이다. 부르심은 합일점을 찾는 여정이다. 하나의 합일점이란 다름아닌 목자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빛과 어둠을 지나 끝내 만나게 되는 일치의 기쁨이다. 부르심의 가장 깊은 감사를 봉헌하는 오늘이다. 

오늘이 부르심의 가장 좋은 응답의 새날이다. 모든 부르심에 감사드리며 기도드리는 성소주일이다. 첫마음을 살리는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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