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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4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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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2022년 5월 4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며,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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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6장 35-40절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 집전

 

 

2022년 5월 4일 (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4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삶의 아픔과 고통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

 

오늘 제1독서는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초대 교회에 닥친 위기 상황을 전하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독서의 중간과 마지막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큰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교회 공동체가 그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 삼아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말씀을 듣게 된 고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시련과 위기 속에서 또 다른 기회와 희망을 찾아 나가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과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걱정거리와 고민들, 때로는 삶을 흔들어 대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시련들은 어쩌면 그것을 통하여 참된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인지도 모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지혜를 청하고,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주어지고 있음을 굳게 믿으며, 우리 삶의 아픔과 고통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깊이 느낄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의 순교가 교회에 크나큰 전기가 됨을 보여줍니다. 큰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들 말고는 신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지만, 그밖의 신자들은 예루살렘 아닌 곳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기 시작했다고,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데 하느님 백성이 흩어졌으니 그때 당장은 그리고 겉으로 보면 교회가 풍전등화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니 예루살렘 교회가 하느님 교회요 우리 교회의 전부라면 정말 암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흩어진 양들을 모으기 위해 오셨고, 당신 교회를 세우기 위해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주님의 그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지경이 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그 바람은 바오로를 비롯하여 유대교 골수분자들이 일으킨 광풍입니다. 

이 광풍 앞에서 신앙이 미약한 사람은 믿음의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박해자의 광풍이 성령의 바람이 되어 오히려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가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자의 광풍을 성령의 바람으로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에 신앙만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면 바람을 타고 갑니다. 

그러면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가 떨어지는 그곳에 씨를 뿌리듯 흩어져간 곳이 복음의 꽃을 피울 곳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많은 교우촌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곳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신앙을 퍼트리고, 영성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영성을 퍼트릴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만 있으면 위기가 아니고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앞서 스테파노의 순교와 박해가 교회에 큰 전기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처럼 교회의 위기가 전기가 되어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에게만 생명의 빵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의 모습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자’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양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피조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자 방식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이웃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창조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빵으로 내어줍니다. 

그런데 내가 피조물로 살 것인가, 창조자로 살 것인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대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웃을 창조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보는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보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나 당신에게 오는 이들이 당신이 아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보내주신 이들이라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이들로서, 이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시는 것이고 영원한 창조자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장 혐오스러운 유튜버가 있습니다. 구독자 300만이 넘는 유명한 유튜버지만 그는 인기와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니코카도 아보카도라는 이 유튜버는 처음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시식 장면을 방송했습니다. 가끔 바이올린도 켰습니다. 하지만 그런 맹맹한 방식으로는 구독자를 모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모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기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모으는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어쨌거나 아보카도는 작전을 바꿔 친구와 함께 아보카도 1만 칼로리를 폭식하는 동영상을 내보냈고 엄청난 구독자 수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폭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안 되니 음식으로 엽기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독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댓글 대부분은 이제 악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엽기적인 행위를 멈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비싼 집에 사는 영리치가 되었지만, 산소호흡기까지 쓰며 생활해야 할 정도로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끼고 먹는 방송을 합니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 사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창조된 피조물들이 됩니다. 주인이 계시지 사람을 만날 때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납니다. 이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 본성에 참여하게 도와주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빵이 됩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로서 영원히 삽니다. 

하루는 떡볶이 가게에 한 아저씨가 찾아와 떡볶이 500원어치만 달라고 청합니다.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위해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었고 “아저씨, 배고프시면 아무 때나 오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저씨는 정말 아무 때나 와서 아무 말 없이 당연한 듯 떡볶이를 먹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드리는 떡볶이 값은 매달 약 70만 원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냥 먹고 나가는 그 아저씨에게 무려 8년 동안 그렇게 떡볶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피조물일까요, 창조자일까요? 당연히 창조자의 마음가짐을 가졌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저씨를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납니다. 제작진은 묻습니다. 

“사람을 돕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냥 쉬웠어요. 오시면 드리기만 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떡볶이 천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천사일 수가 있겠어요.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일어나니까요.”

현재 그 남자는 지자체 복지팀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 남자가 이번 달 말일쯤 의사 선생님의 결정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물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퇴원하셔서 다시 당연한 듯이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드려야죠. 그런 마음은 늘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부자나 권위가 있고 그런 분들한테는 순종이 쉽지만 이렇게 낮은 곳에 계신 분들한테는 무시하거나 이런 부분들이 많잖아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면…. 그런 분들을 통해 낮아지고 그분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웠어요.”

“낮아지고 순종하는 법”을 당연한 듯 무전취식 하는 아저씨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피조물임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키웠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은 자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창조자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창조자가 맡겨주신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창조자는 그 생명이 마를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도 창조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래야 사람들을 피조물로 보고 내가 창조된 그 창조의 소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창조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창조된 피조물로 여기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7-39)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창조자가 되고 생명의 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어서 좋을 게 무엇이겠습니까? 생존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창조자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려면 나도 창조되었음을 믿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셨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맡겨주신 이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빵으로 영원히 살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을 주님께서 살리라고 보내주신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인에서 필수 영양소는 ‘주님’

 

현대에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못 먹어서’가 아니라, ‘잘못 먹어서’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즉석식 또는 간편식으로 빠르고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익숙해진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어서 영양 부족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간편하고 편한 식사가 몸에는 좋지 않습니다. 또 자기 좋아하는 것만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 역시 몸에 좋지 않습니다. 특히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몸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에서 필수 영양소는 ‘주님’이십니다. 영적 생명의 양식인 주님인데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편하고 쉬운 것만 생각해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성당 미사에 오시는 분은 팬데믹 이전보다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못 가고 방송 미사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도 안 가고 방송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편하고 간단한 것만을 선택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이 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빵을 의미하는 줄 알고 그 빵을 자기들에게 좀 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매일매일 먹어도 배고픈 일용품의 빵이 아니고, 양을 따질 수 없는 영적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자기 계시를 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6)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표현으로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포도나무요.’(요한 15,1)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임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고 쉬운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으려면,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해야만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독을 즐기게 된다는 것은 외로움을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혼자가 되는 것, 즉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

- 러스킨 본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 35)

 

모든 것은 흐르고 흘러가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가 부여잡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체이신 주님과 함께 흐르고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의 날들은 생명이 흐르는 푸르른 생명의 날들이다. 생명은 허기짐과 목마름을 느끼는 가난에서 시작한다. 주님과 함께할 때 근원적인 우리의 목마름은 주님 안에서 해갈된다. 

예수님을 몰랐기에 생명도 몰랐다. 막연하고 막막한 생명의 주님이 결코 아니시다. 주님 친히 빵이 되시고 생수가 되신다. 허기를 달래어주시고 갈증을 풀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참된 믿음이란 허기와 목마름을 채워주는 주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간절함과 가난함에서 사람이 되어가는 빵의 여정이다. 

생명의 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빵은 죄를 씻어주며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죄까지 용서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생명의 빵이다. 생명은 흐르지 않고서는 생명의 하느님께 닿을 수 없다. 흐르는 것이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주는 것이며 흐르는 것이다. 허기와 목마름으로 하느님을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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