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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2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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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5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2022년 5월 2일 (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2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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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6장 22-29절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2022년 5월 2일 (월)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2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믿음이 얼마나 어떻게 자리하고 있나요?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군중이 요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일러줍니다. 세리와 군인들도 요한에게 다가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그들에게도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0-14). 

이런 요한의 답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며,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한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건네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의 답변처럼, 착하고 바른 일, 곧 선행과 자선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를 선행과 자선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을 때때로 봅니다. 물론 선행과 자선이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외적 활동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관한 그 믿음이 여러분 안에 얼마나,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힘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그때에 아시아 출신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와 유대인 사이의 논쟁을 소개하는데 내일 스테파노는 이 논쟁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폭력을 쓰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할까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이런 주제가 되겠습니다. 

폭력은 힘으로 치면 제일 차원이 낮은 힘이고, 폭력 밖에는 다른 힘이 없는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경우나 말이 안 되니 주먹을 쓰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의 힘이기에 폭력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힘인 사람은 물리적인 힘은 물론이고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폭력도 가하지 않으며, 상대가 원치 않은 것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사랑만이 그의 힘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스테파노처럼 싸움에 결코 지지 않지만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스테파노가 우리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힘이 있는지. 

폭력이 없는 까지는 좋은데 하느님의 힘마저 없는 것은 아닌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거 아무것도 아니네.

 

미국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자 오즈렘 에이덕(Ozlem Ayduk)과 미시간 대학의 이선 크로스(Ethan Kross)가 벽에 붙은 파리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에 유래한 벽에 붙은 파리 효과(Fly-on-the-wall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갇혀 있을 때, 그 안에서 빠져나와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 고민이 아무리 크더라도 벽에 붙은 파리가 듣는다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여길 것처럼,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으로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인칭 시점에서 부정적 상황을 떠올리면 혈압과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삼인칭 시점으로 보면 감정의 변화도 줄어들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찾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자고 하신 것도 일인칭 시점인 ‘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새로운 ‘나’를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나만을 떠올리고, 내 탓만 따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게 됩니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 요구의 만족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호칭에서도 ‘랍비’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체로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 부르던 사회적 존칭이었습니다. 즉,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했습니다.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면,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연결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는데, 연결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니었을까요? 
 
객관적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시선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람의 일이야.

- 전경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 (요한 6,27)

 

한 줌 재가 될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들 믿음이다. 창조와 부패 사이에 우리들 삶이 있다. 이와같이 썩어질 것과 없어질 것 사이에서 홀연히 영원한 생명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된다. 

혼돈 속에서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말씀의 양식을 먹는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양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양식이다.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길을 걷게된다.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를 깨닫게된다. 우리의 죽음을 치유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새롭고도 뜨거운 생명의 다른 시작이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삼키며 살아가는 새로워진 우리들 삶이다.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리는 사랑의 양식이 결코 아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한 우리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신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생명 없는 양식은 가짜다. 참된 양식은 참된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셨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순간이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양식이다. 소멸과 탄생을 어루만지는 영원한 양식 주님이시다. 하느님을 먹고 하느님을 사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으로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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