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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3주일 -
2022년 3월 20일 사순 제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있는 나다.” 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겠다고 하십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하시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를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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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탈출 3장 1-8ㄱㄷ절, 13-15절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화답송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 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제2독서
1코린 10장 1-6절, 10-12절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6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11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루카 13장 1-9절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잘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하시며,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시는 포도 재배인이십니다.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이 세상에서 천상 양식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이 성사의 신비를 날마다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 집전
2022년 3월 20일 (일)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루카 복음 12장에서 시작된 군중과 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와 연결되어 절정을 이룹니다. 특별히 깨어 기다리라는 종말론적 위기에 대한 경고(12,16-21.35-48 참조)는 화해(12,57-59 참조)와 회개에 대한 촉구(13,2-5 참조)로 이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13,6-9 참조)를 통하여 ‘회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행한 빌라도의 잔혹한 행위를 보고합니다. 그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심판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 갈릴래아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지어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 아래 깔려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러 갑작스럽게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비극적 사건을 통하여 아직 살아 있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12,20 참조).
누구든지 죽음에 갑작스럽게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 자신의 생명도 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회개로써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천벌을 받지 않으려면 바꾸실 때 바뀌어야
우리의 욕 중에 어떤 욕이 제일 심한 욕일까요?
나쁜 놈이나 못된 놈은 성격이나 인격과 관련한 욕이니 그리 심한 욕은 아니고 쌍놈이니 개새끼 같은 욕도 출생 신분과 관련한 욕이니 그리 심한 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벼락 맞아 되질 놈이나 천벌을 받아 죽을 놈에 비하며 그렇다는 뜻입니다.
벼락 맞으라는 것과 천벌을 받으라는 욕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욕이니 욕 중에서 아주 심한 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천벌 받아 죽을 놈은 인간이 벌할 수 없는 놈을 하늘이 대신 벌을 내리길 바라는 욕이니 모든 욕 중에서 제일 심한 욕일 것입니다.
요즘같으면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사람을 살상한 푸틴과 같은 사람에게 누군가 벌을 내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벌을 줄 수도 없고, 다른 누구도 줄 수 없을 때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렸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욕하지요.
그리고 오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빌라도도 이 천벌을 받을 놈일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께서도 빌라도를 그렇게 욕하실 거라고 기대했는데 빌라도 얘기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빌라도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뜻으로 경고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화살로 치면 빌라도에게 가야 할 화살이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고, 손가락으로 치면 죄인이라는 손가락이 빌라도가 아니라 내게로 향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한 말씀으로 교묘하게 흐름을 돌리시고 논점을 바꾸십니다. 일제히 빌라도에게 향하던 시선을 각자 자신에게 돌리게 하시고, 욕을 퍼부으려던 분위기를 자기 성찰의 분위기로 바꾸시며 멸망에 대한 경고를 통해서 회개에 대한 촉구로 논점을 바꾸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경고와 촉구를 통해서 우리를 바꾸어주시는데도 우리가 끝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노력에도 헛되이 멸망케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무화과 나무와 포도 재배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이고 주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게 하려고 애쓰시는 포도 재배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회개의 열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1년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이 1년은 열매를 맺도록 주어진 은총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멸망이 잠시 유보된 위기의 시간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를 흘려버리면 멸망이 닥칩니다.
오늘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여기서, '구하여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사시는 동안 우리를 구하시려고, 곧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포도 재배인이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모든 사람, 오, 그런 일을 실천하고 그런 일에 항구하는 남녀들은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고 그들을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고 하는데 우리는 끝내 회개치 않아 결국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의 가꾸심으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은총의 사람들이 되라는 초대를 받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4~5절)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너무 빨리 꿈을 확정해버리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봉헌할 때 그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분명 회개하지 않은 이는 ‘제물에 봉헌하는 이의 피가 제물에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물에 피를 섞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파견되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파견한 자의 뜻이 아닌 다른 뜻입니다. 지금 그 뜻이 죽는 것입니다. 그 뜻이란 분명 돈에 대한 욕심, 육체에 대한 즐거움, 힘에 대한 욕망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파견되어 일을 수행할 때, 이 세 가지가 아니면 그 일을 완수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여덟을 ‘세속(6)+육신(6)+마귀(6)’의 합으로 봅니다.
그러며 말씀하시는 것이 포도밭에 자라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웬 무화과나무일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되어야 하는 나무를 말할 때 사용했던 상징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한 자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무화과나무의 삶을 버리고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포도나무의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을 버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느님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예배가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에는 내 피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그분의 뜻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위해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어쨌건 그것이 살아있다면 주님의 뜻을 내 안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이 맺기를 원하는 열매를 맺어줍니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포도밭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잘립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가 섞인 제물도 봉헌해야 하고 삼구도 죽여야 합니다.
일본 애니매이션 ‘베르세르크 – 황금시대’의 내용입니다. 여기저기 전쟁터에서 돈을 받고 싸워주는 가츠란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가츠는 뛰어난 실력으로 적의 장수를 죽이고 두둑한 상금을 챙기고는 그를 붙잡아두려는 나라를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 ‘매의 단’이란 용병부대를 만나고 그 대장 ‘그리피스’와 한 판 붙습니다. 그런데 가츠도 그리피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합니다. 결투에서 지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했던 그리피스를 좋아하는 캐스커라는 여자 군인이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가츠기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리피스는 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천민 출신이지만 왕국을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매의 단의 인기는 점점 치솟고 그리피스는 한 왕국의 공주의 마음까지도 빼앗습니다. 이 와중에 가츠는 그리피스가 자신을 친구가 아닌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되는 것을 느끼고는 그리피스를 떠나기로 합니다. 막아서는 그리피스와 대결을 하는데 이제 그리피스가 가츠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피스는 자기 오른팔이 자신을 떠난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공주를 찾았으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갇히고 고문당합니다. 그리고 매의 단도 쑥대밭이 됩니다.
이 사실을 멀리 있는 가츠가 듣게 됩니다. 가츠는 그리피스와의 옛정을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리피스를 구출해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걸을 수도 없고 칼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의 단은 이제 가츠를 우두머리로 캐스커를 그의 오른팔로 삼고자 합니다. 가츠는 그 책임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캐스커도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그리피스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마왕들이 나타납니다. 그리피스를 마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리피스의 야망을 보았고 그게 바로 그리피스라고 합니다. 마왕이 되려면 야망을 위해 친구들을 바쳐야 하는데 그 친구들이 매의 단입니다. 가츠는 마왕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가져보기 전에는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대로 매의 단을 악마들에게 바칩니다. 이 와중에 매의 단은 전멸했고 가츠만이 어떤 힘의 도움으로 왼팔만 잃고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소명은 마왕이 되기 위해 동료들을 제물로 바친 그리피스와 마왕들과 싸우는 것임을.
그리피스는 태어나서 그냥 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이뤄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욕망 속에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악의 힘까지 빌려 엄청난 힘을 지닌 마왕이 되었지만, 친구가 없습니다.
반면 가츠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와주고 구해 주고 또 진정한 사랑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이용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또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꿈에 흐릿하게 보였던 미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피스가 마왕들이 원한 자신들의 후계자였다면 자신은 천사들이 뽑은 마왕과 대적하는 군사였음을.
우리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도 짚단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이란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을 그 꿈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열여덟에 대항하는 욕망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보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꿈을 찾을 수 있었던 회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녀들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네 꿈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도록 종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바라시는 꿈이 무엇일까?”를 찾게 만들어야 회개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꿈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너무 명확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은 처음엔 명확히 깨닫기 어렵습니다. 다만 포도나무로 자라기 위해 그분의 뜻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찾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고 삼구를 이기는 노력을 한다면 분명 포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는지는 지금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흐릿하게 보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꿈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셉에게 먼저 명확한 꿈을 알려주었다면 그는 분명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약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으로 성장했다면 그만큼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게 좋습니다. 꿈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께 접 붙어 있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께 자신을 맡길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인가?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의인은 사람의 잘못을 비난할 때 고통을 느끼지만, 악한 사람은 그것을 즐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인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뒷담화는 주로 사람의 잘못이 그 내용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간다는 말이 있듯이, 뒷담화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즉, 뒷담화를 즐기는 악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판단하고, 때로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뒷담화는 어제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뒷담화로 죄를 더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해서 제단이 피로 물든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실로암 탑을 공사하는데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위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안 되었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생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어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전해주십니다.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의사를 표명했지만, 포도 재배원은 일 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이처럼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회개의 시간 여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시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통해 회개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회개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헨리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회개를 선물로 주셨다. 회개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정신을 차려야 할 회개의 때이다. 참된 회개가 신앙이라는 행동의 나침반이다. 삶의 나침반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 참된 신앙이다. 회개는 멸망을 치유하듯 우리 삶을 치유한다.
삶의 신비는 회개의 신비이다. 회개가 가장 놀라운 하느님의 기적이다. 회개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회개로 연결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회개로 세상과 접촉하고 회개로 우리 내면과 새롭게 만난다.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워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삶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새로워지는 삶의 우선순위는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하느님께서는 멸망의 혼돈이 아니라 회개의 축제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회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사랑이다.
삶의 열매는 우리의 회개로 맺어지는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십자가와 함께하고 열매는 십자가에서 익어간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을 담는 것이 회개이다. 가장 좋은 회개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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