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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2022년 3월 18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넘깁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드시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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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창세 37장 3-4절, 12-13ㄷ절, 17ㄹ-28절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화답송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라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그의 발에 족쇄 채우고, 목에는 쇠사슬 옭아매었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서, 주님 말씀이 그를 보증하셨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의 통치자가 그를 놓아주었네. 그를 왕궁의 주인으로 내세워,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복음
마태 21장 33-43절, 45-46절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주님의 뜻을 성실히 실천하여 약속하신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부 집전
2022년 3월 18일 (금)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하루를 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1─23장에서 수난 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이 논쟁은 22장까지 이어지는데, 예수님과 반대자 사이에 점차 높아 가는 갈등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들은 예수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으로 빌미를 만들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둘째 의미는, 하느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일상적 현실’을 파괴합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주어야 할 소출이 있었으나 그것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과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파괴된 현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날카롭게 경고하셨듯이, 오늘날 누군가 ‘일상적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면 그도 그 경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적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다시 비유를 드시는데 오늘은 주인과 소작인 관계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건데 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작 소작인이라니 말입니다.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래서일까 오늘 소작인들 마음이 이해가 되고,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도 이해가 됩니다. 소작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우리가 하느님의 상속자라고 하잖아요?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 17)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 7)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작인이라고 하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말이 맛습니까?
주님 말씀이 맞겠지요. 소작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 정체성이고,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승격된 정체성이지요.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소작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상속자라는 말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그리스도 신비체론을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관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는 것입니다. 지체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지체로서 살지 않으면 상속권은 얻을 수 없고 소작인도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처럼 살면 아들로서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고,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은 지극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라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거역하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불순종하며 어떻게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소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지만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 곧 두려움과 사랑을 합친 것이 경외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소작인의 비유로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받는 오늘 경외하올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일조’ 봉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첫 조상들은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지옥인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조금 주다가 상대가 그것을 줘봐야 고마워할 줄 모르면 바로 주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분은 그래도 다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출을 바치지 않고 하인들까지 죽이는 그들에게 아드님까지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는 그냥 단순한 깡패 영화 같은데 지금까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무언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개로 이름 날렸던 오태식이 주인공입니다. 조폭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한 명을 죽이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그런 오태식에게 죽임당한 남자의 어머니 양덕자가 면회를 오고 오태식은 그녀에게 감화돼 개과천선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새어머니로 삼습니다.
오태식은 10년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목표를 수첩에 적으면서 출소 후 지키겠다 다짐합니다. 특별히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상 세 가지는 새엄마 양덕자가 꼭 지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오태식이 수감된 중에 마을을 차지하려던 병진이 시의원 조판수와 마을을 접수하고 오태식의 똘마니 양기와 창무도 조판수 밑에 들어갑니다. 오태식이 출소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합니다.
시의원인 조판수는 마을 일대를 재개발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양덕자가 해바라기라는 식당을 하고 있었고 오태식이 그 집에서 살게 되는데 개과천선하려는 그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태식은 새엄마의 말대로 절대 싸움을 하지 않고 맞아주기만 합니다.
조판수 패거리가 양덕자의 해바라기 식당을 부수며 모녀를 위협하고 오태식이 일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집단 폭행해서 사장의 팔을 부러뜨립니다. 이에 양덕자가 조판수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 쓴 일기장 복사본을 보여주며 엄포를 놓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조판수가 양덕자 아들에게 시킨 안 좋은 일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조판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덕자의 딸 희주가 벽돌에 맞아 얼굴을 다칩니다. 그러자 결국 양덕자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태식은 조판수를 찾아가서 함께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더는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판수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라고 하며 그 대가로 태식 오른손의 힘줄을 끊으라고 시킵니다. 명진이라는 형이 있는데 그는 그의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합니다.
집도 내어주어 쇼핑몰을 짓게 하고 가장 싸움 잘하는 아들의 손목의 힘줄도 자르고 딸의 얼굴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조판수에게 여전히 양덕자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기를 시켜 양덕자를 죽입니다.
조판수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축 파티를 하고 있었고 오태식은 자신의 다짐을 깨고 조판수를 찾아갑니다. 술도 마시고 새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벌을 주겠다.”
희주를 급습한 놈을 찾고 오태식은 병진에게는 나가 있으라 말합니다. 병진은 태식의 힘줄을 끊지 않고 상처만 내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태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는 자기 손목과 어머니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더는 그 집에 살 수 없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어렸을 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씻겨주고 재워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삼 형제가 학교 간 사이에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가버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함께 살 수 없을 텐데, 만약 저희까지 해를 끼쳤다면 어떨까요?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면 괜찮겠지만, 다 주고도 생명과 같은 존재까지 빼앗는 벌을 받으면서 자기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강도에게 집을 빼앗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소출을 봉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태수는 자신을 받아 준 새어머니에게 신발을 사드렸습니다.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려고 하면서 어머니까지 죽인다면 그건 아닙니다.
인도에서 부부가 20원 때문에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하느님까지 죽이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의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이런 형국까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소작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소출 일부를 주님께 감사히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지만, 태아가 엄마 배를 갉아 먹는다면 그 태아는 더는 그 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에일리언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인간을 숙주로 새끼를 사람 몸에서 키웁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에일리언 새끼를 몸속에서 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하느님 몸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살려면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이를 가지게 된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어떤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앞의 차가 불안했습니다.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았습니다. 이 차의 뒤에 ‘초보운전’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형제님께서 “저렇게 운전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를 추월하면서 보니 젊은 형제님께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에 미숙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여성이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남성도 많습니다. 또 반대로 엄청나게 운전을 잘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 역시 고정관념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유다인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죄에 빠져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해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를 학대합니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끝내는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못된 백성은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의 비유’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고 하시지요.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은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못된 소작인과 같이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으로 언제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올바른 판단으로 주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찾을 수 없다.
- 테모크리토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마태 21,39)
포도밭은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코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포도밭이 아니다. 사실은 삶의 어두운 욕망의 근원이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데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은총의 사순이다.
삶의 포도밭에서 우리를 살게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이다. 세상은 그걸 참 모른다. 하느님을 죽이기에 우리의 관계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다. 욕심에는 길이 없다. 욕심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포도밭에서 다시금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삶의 질서와 욕심의 절제를 다시 배운다.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욕망의 포도밭이 아닌 함께 행복한 포도밭이길 간절히 원하신다.
이 사순시기 우리 삶의 포도밭을 다시 보게된다. 하느님께서 잠시 맡기신 생명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하느님께 돌려드릴 일이다. 하느님께 지나친 우리의 욕심과 파괴하는 무질서를 봉헌한다. 관계가 새로워져야 포도밭도 새롭다. 모든 관계와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장 좋은 흠숭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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