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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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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2022년 3월 17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7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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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예레 17장 5-10절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6장 19-31절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의 힘으로 저희가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 집전

 

 

2022년 3월 17일 (목)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재물에 대한 강한 애착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루카 복음 16장에서는 재물에 관한 여러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향한 논쟁(16,15.16-17.18 참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16,14)을 반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는 세 명의 인물, 곧 부자와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은 루카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되는 비유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현세적 모습은 대조적입니다(16,19-21 참조). 그러나 이들은 죽고 나서 ‘종말론적 역전’을 경험합니다(16,22-24 참조). 

부자는 현세에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았지만, 그 가까이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죽은 뒤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라자로는 비록 현세에서는 배고프고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은 뒤에는 아브라함 곁에서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이름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엘라자르’가 그리스어로 축약된 표현입니다. 이 이름에 따라 라자로는 현세에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지만, 죽음 뒤에 하느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강한 애착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특히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 5,1-11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관심에 대하여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오늘 복음의 얘기는 제 생각에 어떤 부자가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시며 얘기를 시작하시는데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니거나 부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는데 주인공인 부자는 이름이 없고 그저 어떤 부자라고만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그 반대로 라자로는 이름이 없고 그저 거지로 불리고, 부자는 오히려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름이 등록되지 않아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하느님 나라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을까요? 라자로에게 못할 짓을 하고 못살게 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라자로와의 관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에게 한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며 악한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사람 곧 무심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찰을 이렇게 하면 우리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으로 천당 갈 거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지옥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 없음과 관심 없음으로 인한 이 세상에서의 관계 단절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이어져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고립을 살 수밖에 없게 하지요. 

비유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라자로와의 접촉만 시도합니다.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를 돕게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구렁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성찰을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을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부자는 자기의 집, 자기의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성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이 다 있고, 그 안에서 자기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문 밖의 라자로를 보면서도 마음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거나 마음이 불편할까 봐 아예 관심을 끄고 외면했을 겁니다. 

자기의 성 안에서 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하느님도 필요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는 주님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무관심에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뿐 아니라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하느님 나라 무관심도 있고, 어쩌면 이것이 더 끔찍한 무관심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나자로에 대한 무관심보다 하느님 나라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끝에 자기 형제들만은 회개하여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다시 청하는데 이때 형제들이 해야 할 회개란 어떤 회개일까요? 

그것은 무관심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무관심이겠지요. 무관심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는 ‘라자로’란 이름으로 살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아 지옥 갔고 거지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아 천국 갔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쁜 것만 받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라자로’란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름이 나오는 것은 여기에서 라자로가 유일합니다. 그러니 라자로란 이름이 분명히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이름 ‘엘아자르’의 그리스식 이름, ‘라자로스’입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도우심을 믿고 사느냐, 자기 힘으로 사느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 부자의 상황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는 상태입니다. 생존을 위해 고생해야만 한다는 파라오에 속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내일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일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약탈자가 됩니다.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홍해를 건너는 순간입니다. 홍해를 건넘은 곧 세례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때 받는 이름이 ‘라자로’입니다. 세례를 받았으면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신앙고백을 우리는 ‘십일조’ 봉헌으로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라자로’란 이름을 지녔다면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 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데 그사이는 절대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습니다. 그 구렁텅이가 본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조금씩 하느님 자녀의 본성과 사탄 자녀의 본성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라자로’란 이름은 표징을 보고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선택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죽은 이가 부활하는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믿음은 말씀을 듣고 내리는 ‘결단’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대만 영화 ‘네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다 – 필수 ADHD’는 성적이 떨어지면 아이들이 소각되는 이상한 미래를 상상한 영화입니다. 이 시대는 자녀의 공부로 부모의 지위가 결정됩니다. 엄마는 첫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인공수정으로 딸을 얻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 삽니다. 

하지만 딸은 머리가 안 좋아 공부를 못 합니다. 만약 딸이 성적이 떨어지면 딸은 소각되고 엄마는 하층민으로 내려앉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딸을 ADHD로 믿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딸은 그나마 이런 연기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서 소각당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때 딸에게 어떤 하층민 아주머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처럼 거지로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경쟁의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부자로 살아서 가난한 생활은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결국엔 소각되고 어머니는 또 다른 아이를 인공수정으로 임신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웁니다. 

여기서 엄마는 자아를 나타냅니다. 자아는 생존하기 위해 편안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아져 봐야 엄마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인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부자의 삶입니다. 선택하면 됩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자아의 종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어머니는 다릅니다. 포레스트는 불편한 다리와 아이큐 75밖에 안 되는 머리를 지닌 외톨이 소년입니다. 그의 헌신적이고 강인한 어머니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초콜릿을 꺼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포레스트는 따돌림을 당해 도망치다가 자신이 잘 달릴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풋볼선수가 됩니다. 그리고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서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동료를 위로하겠다고 탁구를 하다가 훌륭한 탁구선수가 됩니다. 이어 군 동료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새우를 잡다가 큰 사업가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장이 됩니다.

포레스트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인생은 알 수 없으니 가는 대로 맡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잘됩니다. 사실 포레스트가 오늘 복음의 ‘라자로’일 수 있습니다. 거지로 살더라도 먹을 것이 있으니 그냥 오늘 해야 하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뛰어야 한다면 뛰고 탁구를 쳐야 한다면 치며 군대에 가야 한다면 가고 일해야 한다면 합니다. 그는 돈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의 초콜릿 맛은 다를지라도 항상 달콤한 초콜릿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았기에 그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진 라자로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에서 낯선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소방서와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무작정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방대원이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아무개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보세요. 제 이름과 세례명을 대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비록 꿈속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 한 성당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에 매우 자랑스러웠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깨어나서도 그 뿌듯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이 있는데 왠지 그런 것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으면 하느님께서 ‘라자로’란 이름으로 사는 우리를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돈이 없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냥 빌리기만 해도 주님께서 보증해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한 인생 살다 갑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 하다가는 히틀러나 카다피, 혹은 푸틴처럼 이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거지로 살더라도 개에게 자기 종기까지 핥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어줄 것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주시는데 못 줄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평화는 믿음에서 나오는데 그 믿음은 그저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할 때 그때가 비로소 참 ‘세례성사’를 받은 것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자와 라자로

 

종종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분이 계십니다. 많지는 않지만 얼마를 도와 드립니다. 대부분 감사의 인사를 하시며 나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받은 돈을 들고 화를 냅니다.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마치 돈을 맡긴 것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어려운 자신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도와드리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면서 성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차를 몰고 어디를 가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5.7)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가 바로 사람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제힘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겸손을 보이지 않았고 불쌍한 이웃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힘에 의한 것으로만 착각하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오로지 주님을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뜻이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이라는 점을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했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런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게 됩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식사가 끝나면 손을 씻는데 빵으로 손을 문질러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은 부스러기를 식탁 밑으로 던집니다. 원래 이것은 개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이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어떠했을까요? 저승의 고통에서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종 부리듯이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하지요. 
 
부자와 라자로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불평불만 없이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잘한 것은 자기 탓이고, 못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늘 불평불만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실수에 화가 난다면 즉시 자신을 돌아보고 비슷한 실수가 없는지 생각해보라.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면 금세 화가 가라앉을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우리들 시간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실상이다. 가장 단순한 진리로 돌아가는 은총의 사순이다. 어느 것 하나 내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우리들 생명이다. 죽음 너머 또 다른 삶이 있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위선의 가면을 벗게한다. 지치고 쓰러진 라자로를 향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시는 주님이시다. 생명을 위로하시고 삶을 위로하신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우러져 사는 삶을 보여 주셨다. 

가난한 라자로와 부자는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이다. 미움과 멸시 반목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잘못을 고백하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삶과 죽음에 관한 참된 회개이다. 죄가 있는 곳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는 곳에 위로의 하느님 나라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며 우리보다 먼저 살다 떠난 이들의 값진 유언이다. 용기내어 다시 시작하는 회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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