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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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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셉 대축일 -

 

 

2022년 3월 19일 (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다윗이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9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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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사무 7장 4-5ㄴ절, 12-14ㄱ절, 16절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로마 4장 13절, 16-18절, 22절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장 16절, 18-21절, 24ㄱ절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꿈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 그대로 하였습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복된 요셉의 축제를 기쁘게 지내며 이 제대에서 생명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저희를 영원히 지켜 주시어 자비로이 베푸신 은총을 길이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윤윤상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3월 19일 (토)
윤윤상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19 참조). 요셉의 ‘의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하느님의 계명,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 준수만으로 그의 의로움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신명 22,20-21 참조)에는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할 경우 받게 되는 형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처럼 그의 ‘의로움’은 약혼녀 마리아를 향한 사랑, 법규나 규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데 있습니다(마태 1,2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신앙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을 내린 요셉은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셉에게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밀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 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이유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은 항상 ‘의로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의롭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앞에 나설 힘’을 말합니다. 돈을 꿔 가서 갚지 않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아드님을 의로움의 옷으로 만들어 우리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로움이 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입었다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김희아 씨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보육원에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다른 부모들을 평소에 심판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딸인 김희아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른 부모들을 심판한 것 때문에 더욱 자신들이 키우지 않은 딸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돈 2억 갚아”란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 어떤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돈을 꿔 가서 자취를 감췄다가 형이 죽기 직전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던 것인데, 형은 마지막 힘을 주어 “내 돈 2억 갚아”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꾸어준 돈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받아내려 한다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희생시켜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나설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 힘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벤야민이 이스라엘 재상이 된 요셉의 은잔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벤야민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갇히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청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들이 요셉을 만날 힘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기나 기생충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은 주는 만큼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느님도 

오늘 축일을 맞는 요셉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죄까지도 나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이 짓는 죄들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에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세상 모든 죄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는 모두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들입니다. 

‘프리쳐’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지옥이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지옥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잘못들을 매일 똑같이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유진이라는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그 충격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유진은 하느님은 더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보려면 살아야 한다고 위로해줍니다. 트레이시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이 하려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둡니다. 

이때 트레이시는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오랫동안 트레이시를 좋아했던 유진은 트레이시에게 키스합니다. 트레이시는 유진까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참지 못하고 자살 시도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진도 그렇게 합니다. 둘 다 죽지는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유진도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힘을 가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참다못한 목사님이 “그럼 지옥에나 가버려라!” 하니까 지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이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유진이 지옥에 오자 이 홀로그램 시스템에 문제가 생깁니다. 간수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 손들어봐”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있는 대다수는 순을 번쩍 들며 자신들은 진짜 지옥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큼 지옥에 합당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결코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안에서 죄를 찾아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과 생각과 욕구로 살아갑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음탕한 욕구로 여인을 바라보아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이 존재합니다. 이 욕구와 반대되는 사랑이 들어올 때, 내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들이 다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든 크든 세상 모든 사람이 짓는 죄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바로 사랑도 욕구이고 모든 죄의 근원도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서면 자신 안의 악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만약 행위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로 보자면 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면 나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도 내가 미움까지 가지 않을 무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잡는 유도탄이 있다면 비행기는 그 유도탄을 교란하는 교란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판단이 될라치면, 그 미움은 마치 유도탄처럼 나에게 날아옵니다. 만약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교란탄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을 결국엔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임신하고 온 마리아의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냥 파혼하면 임신시켜 놓고 살기 싫어 파혼시키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이 판단되면 유도탄이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빨리 내 안에서 그와 같은 죄를 찾아내어 교란탄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란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려는 의지로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사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과 사랑의 힘.

 

중세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꼽는다면 아마 ‘마녀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 마녀 판별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진짜 마녀는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사실 진짜 마녀라면 인간이 어떻게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무고한 사람이 마녀로 몰렸을 뿐이었습니다. 
 
마녀 판별 중에 조금 어이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오르면 마녀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떠오르지 않는지를 계산해서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익사할 때까지 그냥 놔뒀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죽음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결백한 사람이었다고 판정만 했습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보다는 이해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단죄보다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생명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에 대한 보고는 복음서에서 그리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약혼상태 남편이며,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였음을 전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를 범한 경우, 공개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누가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공개 재판을 받게끔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꿈’일 분이라고 간단히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의 계시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만큼 마리아를 믿었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의 양부가 될 수 있었고, 이 땅에 구원의 빛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힘은 큽니다. 
 
우리 역시 믿음과 사랑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픔과 상처를 이 땅에 남겨서는 안 됩니다. 대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불평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불평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순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24)

 

삶이 힘들 때 요셉 성인을 만난다. 삶이란 때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우리를 계속 찾아올 때가 많다. 우리의 시간이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우리들에게 먼저 당신 삶으로 이야기 하는 요셉 성인이시다. 진실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진실한 삶이란 자신의 자리를 잘 다듬고 잘 간추리고 잘 순명하며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과 함께 풀어가는 삶이다.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는 삶이다.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다. 새로운 탄생은 쉬이 오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을 거친다. 요셉 성인은 정직하다. 하느님을 어려워 할 줄 알았고 땀 흘린 노동의 댓가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갔다. 

참다운 신앙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스스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갔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성찰의 삶이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 가장 힘있는 삶이다. 그 일을 해낸 분의 삶을 만나는 오늘이다. 하느님 말씀의 적용과 실천이 필요한 사순의 삶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탄생의 곁에는 지극히 진실한 한 사람이 있다. 성 요셉같은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진실로 변화된다.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이다. 말씀이 한 사람을 빚어내고 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사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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