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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2022년 3월 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다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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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예레 18장 18-20절
어서 그를 치자.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나이다. 사방에서 두려움이 밀려드나이다. 저에게 맞서 그들이 함께 모의하고, 제 목숨 빼앗을 음모를 꾸미나이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복음
마태 20장 17-28절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불사불멸의 보증으로 주신 이 성체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부 집전
2022년 3월 16일 (수)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6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섬기는 종이 되라.
마태오 복음 16장 21절부터 20장 34절까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맞으실 비극적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그 가운데 세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 이어서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아들들의 영광을 요청하자,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닌 권세의 남용을 지적하십니다(20,25 참조).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통치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십니다(20,26 참조). 이 지침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권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드러내는 무능을 보여 주시면서, 대조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분이셨고, 많은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20,28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줍니다. 섬기는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에게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셨고 우리의 종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자기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이것을 보고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청하고 싶은 것이 같았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수난의 잔 곧 고배(苦杯)를 마시려고 하는데 그들은 샴페인을 터트려 축배(祝杯)를 마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축배를 마실 때 주님의 좌우에서 그 축배를 마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나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우리는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며 그렇게 많이 배웠는데도 제자들이 그러는 것이 참 한심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코 남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는 정말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까? 우리는 진정 주님의 좌우에 있고 싶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길에 같이 있고 싶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처럼 양편에서 매달리고 싶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이런 건데도 진정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까?
진정 주님과 함께 있고는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욕심입니까?
그런데 어떤 것이 진정 내가 원하고 청하는 것인지 알고 싶으면 평생 내가 청한 기도가 무엇인지 보면 알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게 해달라거나 하는 일이 실패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을까요? 병에 걸리거나 몇 배의 고통을 더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을까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고 반대로 기도했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을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는 자녀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모든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가 그 핵심주제입니다. 여기서는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열두 사도 중 더 높은 위치에 앉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는 어머니가 대신 청합니다. 자기 아들 둘을 마지막 때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이에 나머지 열 제자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아버지 앞에서 더 높아지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섬기기 위함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유튜브에 오빠와 여동생이 좀 위험한 곳을 건너가는데 여동생이 너무 작아 건너지 못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 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보지도 않는데 이렇게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오빠는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은 오빠는 굳이 동생과 경쟁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형제끼리 서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물론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약 부모가 형제를 차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은 경쟁하게 됩니다. 가족 공동체라기보다는 회사처럼 경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지옥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첫째 13살부터 막내 2살까지 7남매를 키우는 한 부부의 일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아이 일곱을 키우는데도 부모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가정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아빠는 밤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엄마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밤 10에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재웁니다.
여기에서 외톨이가 되기 시작한 아이는 13살 사춘기가 된 아들입니다. 첫째는 이제 동생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들을 괴롭힙니다. 일곱 형제 중 유일하게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 엄마가 너무 많은 아이를 키우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골라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첫째와 둘째를 경쟁시킵니다. 먼저 동생들과 놀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을 골라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가 조금 성숙했으니까 판매원에게 물어서 엄마가 원하는 장난감을 먼저 가져갑니다. 둘째는 경쟁이 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삐져서 말도 안 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을 지적합니다. 형제간에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장이 매우 빠른 연령대에서 오빠에게 경쟁이 안 되고 오빠는 경쟁에 이기더라도 본전입니다. 지면 동생들 앞에서 말이 아닙니다.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동생들과 함께 안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더 편안합니다. 전쟁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자녀를 경쟁시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됩니다.
경쟁하게 되면 자녀는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경쟁이 두려워 아예 회피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경쟁에서 이기려 기를 씁니다. 경쟁을 회피하는 것도 경쟁하는 것입니다. 달리기에서 멈추어 섰어도 여전히 운동장에 있는 것입니다. 경쟁하건, 경쟁을 포기하건 경쟁 안에서는 쉴 수 없습니다.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 삽니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은 동생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쟁을 독촉하는 이 자매를 어떤 남편이 참아줄 수 있을까요? 남편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고 이것을 안 자매는 자기처럼 능력 있고 예쁜 여자를 두고 그런 남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되어야 하기에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가 안 됩니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꿈에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눈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녀는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눈이 커서 아빠에게 사랑받고 자신은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사랑 못 받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이 이유로 눈이 큰 여자를 좋아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아서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자녀를 경쟁시킨다면 참 부모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회사 상사나 군대 상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곳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서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과의 상담 약속을 어긴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 교수도 배를 타고 휴가를 떠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사실 그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어렸을 때 그런 상처가 있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면 됩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지금 경쟁을 멈추면 됩니다. 어떻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수난하고 돌아가시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더는 경쟁하는 사람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5살 동생에게 밀려도 “괜찮아요. 형이니까 양보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부모에게 배웠을 것입니다. 대성이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동생과 싸워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장난감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형제를 섬기는 죽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가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나라도 하나의 부모 역할을 합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경쟁을 강요한다면 자녀들을 이용해 자신만 부강해지려는 모기와 같은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학생 자살률이 세계 1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경쟁시키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밑에서 경쟁하는 봉사자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자녀들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주고 믿게 해서 그 자녀들이 서로를 섬기게 만듭니다. 지옥을 선물하려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야합니다. 모든 노력은 다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미 인정을 받았다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곧 섬기는 일만 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성당에 갔다가 후배 여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오빠는 기타 못 쳐요? 저는 기타 치는 남자가 너무 멋져 보여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여학생들도 “나도 그런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기타만 쳤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기타 코드도, 힘든 주법도 상관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이 기타 잘 치는 남자가 멋지다고 하니까…. 힘들지 않게 기타를 스스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좋아하게 되고, 그 덕에 능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운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니 저 역시 원하는 것이 되고 그만큼 신앙생활도 쉬워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만 보면 큰 걸림돌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이미 두 번에 걸쳐 말씀하셨고, 이번에 세 번째의 마지막 예고로 그만큼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지요. 아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의 성과를 욕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고통과 시련을 받아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이들 역시 그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주님 사랑에 집중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 성녀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는 사순의 십자가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 주님의 자리마저 빼앗게 된다. 십자가를 부정하고서는 결코 삶을 되찾을 순 없다. 목숨을 바치러 오신 사랑이 삶의 출발점이며 목적지이다.
목숨은 십자가의 섬김으로 드러난다. 올바른 자리매김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커져버릴대로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가장 큰 지혜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맑은 사랑의 길을 걸어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들을 가르치신다. 지배하고 독점하는 욕심이 아닌 섬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방향이다. 모든 삶이 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배우게 된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사랑과 섬김이 목숨을 감추는 삶이 아닌 목숨을 바쳐 이루어내는 가장 값진 삶임을 믿는다. 십자가와 삶과의 간격은 낮아지고 섬기는 사랑에 있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삶의 진정한 해답이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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