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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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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2022년 3월 12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2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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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신명 26장 16-19절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당신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당신의 의로운 법규 배울 때에, 올곧은 마음으로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당신 규범을 지키오리다. 저를 끝내 버리지 마소서.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43-48절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은 저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시고 천상 지혜를 받은 저희를 구원의 샘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정해성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3월 12일 (토)
정해성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예수님의 이웃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한 율법을 소개하시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율법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조문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고자 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여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십니다. 사랑받을 대상은 원수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해석에 따라 레위기 19장 18절의 경계를 넘어서, 차별 없는 사랑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비교 대상으로 세리와 이방인을 말씀하십니다. 세리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이방인들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합니다. 세리들은 정직하지 못하였고, 로마인들과 협력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세리나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행동 기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마태 5,45 참조). 제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리나 이방인과 같은 이들의 행동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행위 기준을 찾아 행동할 때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살아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5,48 참조).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담긴 ‘이웃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의 대상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한정하지 않으시고(레위 19,18 참조), 확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루카 10,30-37 참조). 예수님의 사랑이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이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의 대상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초월의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제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가르쳐주신 주님께서 오늘은 그들의 사랑을 능가하라고 가르치시며 그것은 하느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원수가 있을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는 원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느님께는 사랑의 대상만 있지 원수가 없으며, 하느님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께서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원수는 없으며 원수였던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겠습니다.

1초 전까지 원수였던 사람인데 이제는 원수가 아니어야 사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금은 아직 원수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말씀이며 마침내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하느님처럼 사랑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처럼 완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월 의지입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인간적인 사랑, 이 인간적 사랑을 초월하여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려는 초월 의지 말입니다.

교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지나고 나면 원수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원수가 아닙니다. 아직 원수인 사람은 아직 지나지 못하고 여전히 원수인 상태이고, 여전히 원수인 사람은 하늘로 오르지 않고 여전히 땅에 있는 겁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뭣하러 뒤를 돌아다보며 과거에 머물고 원수에 머물고,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 사랑에 머물려는 사람이 어찌 땅의 원한에 머물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초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초월 의지는 우리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수준까지 오르려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인간적인 사랑과 미움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려는 의지입니다.

이런 초월 의지에 의해 하느님 사랑에 머물게 되어 이제 더 이상 원수는 없고 불쌍한 사람만 있으며 그래서 불쌍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도 믿음이고 미움도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고정원 씨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이 세상이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무작정 걸어서 화가 발생한 곳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움의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복음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이 지상에서 떠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누구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제 묵상 내용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거울과 오은영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 이 세 가지의 도움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말썽부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사람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가 의대에 입학해 해부학 교수에게 처음 받았던 것은 한 인물의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9번 테이블: 폴, 공장 노동자, 사망 원인: 폐 암종.”

처음엔 그래도 자신의 테이블에 누워있는 시체가 한 인간의 존엄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르고 쪼개고 분해하고 하다 보니 점점 폴이라는 한 인물의 시신이 아닌 하나의 교육 보조재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환자를 약물과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는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인 그녀가 『다정함의 과학』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이 책은 수술과 약물보다 사랑이 인간의 몸까지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사로서 많은 비판을 받을만한 내용입니다. 그녀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켈리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낼 때 문법을 꼼꼼히 따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인 딸은 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엄마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어머니는 오늘 손을 쥐었다 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켈리는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I(꼭 쥐기) LOVE(꼭 쥐기) YOU(꼭 쥐기).”

그날 켈리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서로의 손을 세 번씩 꽉 쥐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걱정하는 딸에게 괜찮다는 엄마만의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2주 동안 어머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다가 더는 어머니가 손을 쥘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수업을 할 때 그렇게도 세세하게 해부하던 인간의 육체만 남은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간 걸까? 영혼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켈리의 거의 두 살이 다 된 사랑스러운 아들 제이를 자주 돌봐 주었습니다. 제이는 자신과 놀아주던 할머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켈리가 할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말할 때마다 제이는 “할머니는 내 마음 안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던 날 밤, 제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이를 켈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말을 갓 시작한 제이는 켈리의 품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켈리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아들을 더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이가 갑자기 켈리의 손을 잡고 세 번을 꽉 쥐었다 폈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처음 엄마 손을 꽉 줄 때 엄마는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으며, 세 번째 잡아줄 때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이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완전히 잠이 달아났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손을 세 번 꽉 쥐었다 펴는 것은 켈리와 엄마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제이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의 손을 잡는 적도 없었습니다. 증거 중심으로 일하는 의사로서의 켈리는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엄마의 딸로서의 켈리는 “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는 여전히 네 곁에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위 ‘토끼 효과’를 발견합니다. 한 사랑 가득한 여성이 준 음식을 먹은 토끼들만 특별히 더 건강하다는 실험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의 환경 안에 살게 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일어나는 병까지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화병이 있는데, 이것은 약물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만 치유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용서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 중 ‘로스트’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객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며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괴물도 나타나고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나지만, 또 그 사람들 안에서 불목과 의심과 미움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가끔 죽었던 사람들도 등장하고 이전에 지었던 잘못과도 연결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계’였고 여기에서 진짜 선인과 악인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역할도 하는데 이 지상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황당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생존하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들이 죽었음을 인정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감정을 털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죽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움 속에 남겨집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 감정을 규정합니다. 지옥에 머물며 천국의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천국에 살며 화를 내거나 음탕한 마음을 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증거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에 대한 용기 있는 결단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증오를 없애는 방법

 

분노, 짜증,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큰 부담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 능력이 있는데 면역 기능이 채 발동되기 전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느끼면 면역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몸에 무리를 주는 것입니다. 고혈압, 동맥경화, 위장 및 심장질환, 자가 면역 질환, 더 심하면 암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싸운다고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질까요? 계속 내 마음에 남아서 내 생각을 지배합니다. 때로는 꿈에서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긍정적인 감정으로의 전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상대방과 논쟁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점점 나쁜 쪽으로 흐릅니다. 이때 해결책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치고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긍정적 마음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나를 먼저 설득해야 했습니다. 
 
항상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문제의 해결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망가트리는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나 나를 살리는 긍정적 생각인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복수하지 않고 참으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냥 원수를 피하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실천에 옮기기가 힘든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역사 안에서 원수가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적국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미워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느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증오를 없애는 방편은 ‘사랑’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덕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미움, 증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어떻게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을 억누르는 불행은 당신의 직업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있다. 내면의 부름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기예나 기술, 실로 어떤 형태의 삶이든 선택한다면 세상의 그 누가 자신의 상황을 견딜 수 있겠는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5)

 

자연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자연은 공평하기에 선물이다. 산다는 것은 자연처럼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질서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언제나 자연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듯 참된 사랑의 주인 또한 하느님이시다. 

사랑은 오만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관계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진정 사랑의 핵심이다. 사람또한 자연의 일부이듯 사랑의 일부인 사람이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듯 사람과 사람 또한 어우러져야 한다.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을 욕심으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는다. 자기입장만 내세우지 않는다. 사랑이 부족한 제 자신을 아프게 반성한다.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십자가는 보편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을 따라간다. 사랑은 사람과 자연처럼 신앙심과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이다. 우리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은 분명 사랑의 힘이다.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사랑이 미움과 증오 갈등과 대립을 지나 완숙한 사랑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시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랑의 새 날이다. 하느님의 아침햇살이 모두에게 다시 두루 비치는 기도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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