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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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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2022년 3월 11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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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에제 18장 21-28절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20ㄴ-26절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새롭게 되어 옛 죄를 깨끗이 씻고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3월 11일 (금)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여섯 개의 계명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은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말씀(5,17-20 참조)에 이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여섯 개의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주제는 살인, 간음, 이혼, 거짓 맹세, 보복,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 규정을 제시하시고, 이어서 각 율법 조문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전통을 받아들이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 곧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5,2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살인 금지에 관한 율법의 가르침(탈출 20,13; 신명 5,17 참조)과 규정 위반에 따른 결과를 설명하십니다. 살인은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의 가르침에 동의하시지만, 제자들에게 살인을 유발하는 원인까지 살피게 하십니다. 성을 내는 행위는 살인의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살인과 성냄의 대조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성하러 오셨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율법의 요점은 인간관계와 관련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극한 상황에서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화해를 통하여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죄의 뿌리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시면서, 한편으로는 화해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손잡고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인정하시기는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의롭고 실제로 상당히 의로운 존재들이며 의로움의 기준이 다를 뿐 그들도 의로운 것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기준이 율법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법적인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능가하라고 하시는 의로움, 곧 주님의 의로움은 그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의로움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 기준이고 그러니 사랑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도 있으니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살라고 하신 것도 율법을 능가하여 사랑을 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랑의 한 예로 용서와 화해의 사랑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조목이 있고 그것이 사랑 아닌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성조차 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완전하지요. 

살인은 1% 미만의 사람이 저지르는 죄악이고 반反 사랑인 데 반해 성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1%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성도 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도 하지 않는 1% 미만의 사랑을 할 수 없어서 성을 내고 욕을 해 형제를 마음 아프게 했다면 그 다음 사랑으로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하는 사랑 정도는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사랑에 있어서 아예 성을 내지 않거나 바보 멍청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하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못 되고 그래서 형제에게 잘못했다면 화해는 하라는 말씀이고, 화해하지 않은 채 하느님 당신께 오는 사람은 받아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사랑의 의로움이 없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사랑하지 않고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형제와 손잡지 않고 외로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일랑 아예 하지를 말라는 말씀이요 형제를 일부러 떼어놓고 들어갈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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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내는 법 : 에덴동산에서는 화 날 일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려는 의로움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그러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자칫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로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화는 내고,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음탕한 마음을 가지며, 자선은 하지만 남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행동은 바꾸지만 속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조차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로움은 나의 의지로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언젠가는 힘이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 ‘성을 내는 것’이 나왔기에 이것으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은 내는 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화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입니다. 아이는 게임머니로 아버지, 어머니 몰래 수백만 원을 결재하고 경찰서까지 데려간 아버지 앞에서 그냥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는 매우 차분합니다. 부모를 닮았다면 아이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가 바빠서 아이의 가장 중요한 성장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잔소리와 간섭이 심합니다. 무조건 말을 하면 다 고쳐지는 줄 압니다. 배가 나왔다고 살 좀 빼라고만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는 매우 불쾌합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자신을 존중해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결국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아이를 통해 자신이 무언가 채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왜 화를 내는 것일까요?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몸을 숨기는 아담과 하와의 처지와 같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피’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에덴동산에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죽옷’입니다. 그 피가 의로움입니다. 내가 의로워져 에덴동산에 살면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화는 에덴동산 밖에서 내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분명 창조자의 피 흘림을 전제합니다. 창조자의 피 흘림 없이는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 힘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합니다. 화가 풀린 곳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오는 것입니다. 화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 안에 머물면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성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성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에 살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의로움이 곧 당신 가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피 흘림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노 조절을 못 합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에게도 막말을 쏟아냅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은영쌤이 추천한 방법은 ‘몸 관찰하기’였습니다. 거울을 가져다 놓고 오은영쌤이 금쪽이 보고 “네가 생각하기에 바른 자세로 앉아봐”라고 합니다. 아이는 일부러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삐딱한 모습으로 앉습니다. 이때 “거울로 한번 봐봐. 바른 자세인지 한번 봐봐”라고 하니까 아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 없는 일을 시켰는데 잘 따라 합니다. 

그런데 왜 엄마의 말은 안 들었을까요?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에덴동산으로 데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이 바로 가죽옷의 역할을 합니다. 가죽옷도 그렇지만 거울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우선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은영쌤이 있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자녀에게 성을 낼 수는 있지만, 직장 상사나 본당 신부님에게 와서 성을 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도 참을 것입니다. 금쪽이는 지금 오은영쌤과 수많은 제작진이 둘러싸고 있기에 그들 앞에서 힘에 눌린 것입니다. 

그다음은 ‘아드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을 내는 것을 자신이 보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거울 효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꾸는 것을 거울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매일 거울을 봅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마지막으로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금쪽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이것을 바라며 성의 기둥에 들어가 있는 어머니 덕분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것을 누르고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그 많은 사람의 고생을 무시할 만큼 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는 거울과 같은 모범, 창조자의 권위, 그리고 자녀를 위한 피 흘림의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없다면 자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피 흘림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창조자의 피가 섞여 있느냐, 섞여 있지 않으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피 없이도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이 표출되는 것이 성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의 피는 성낼 일이 없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에덴동산에서 감사만 남지 성낼 일이 없습니다. 성내고 사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화는 자아에서 나오는데 자아는 창조자의 피만이 화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에덴동산이 아니라면 화나는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본성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남의 문제입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은 저절로 가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워할 일, 감사할 일

 

어느 형제님께서 명절 제사를 지내고서는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도와줬지만, 그런데도 힘들다며 형식적인 이 제사를 매번 치러야 하냐면서 푸념하는 아내가 너무 미워서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라고 묻자, “제가 밤도 까고 전도 부치고 청소와 음식물 분리수거도 해줬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도왔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많이 도와주신 것인가요? 그러나 제사의 주체가 누구일까요? 
 
제사 지내는 이 조상님은 형제님의 조상님이었습니다. 아내는 형제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무 상관 없는 조상님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지면 남편이 돕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아내가 도와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일이 아닌, 남편의 일입니다. 
 
남편은 돕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서 당연히 아내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미움이 생기면 얼른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완성의 첫 대목으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제시합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셨다면, 이 계명은 폐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계명을 더 확장하십니다.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악한 마음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긴 살인은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악한 마음이 뿌리 뽑혀 사라진다면, 굳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이 등장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뿌리 뽑기 위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는 종교적인 뜻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자를 가리킵니다.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고 단죄해서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움을 어떻게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니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4)

 

형제를 다시 바라보는 은총의 사순이다. 새로워지는 삶이란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삶이다. 화해하는 삶을 다시 배우는 화해의 시간이다. 기도의 관계란 다름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화해가 생활이고 화해가 기도이다. 옳고 그름의 얼어붙은 관계를 다시 녹이는 화해이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은 화해로 흘러간다. 

화해는 과거 안에 갇힌 우리가 과거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사람을 다시 만나는 현실의 기쁨이다. 비로소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은총이다. 모든 사랑의 역사에는 화해가 있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화해를 일깨워 주신다. 정지한 마음이 다시 흘러가는 화해이다. 마음과 사람을 다시 얻는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건드리기에 실패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음의 심장은 화해의 심장이다. 화해는 심장 뛰는 하느님의 것이다. 화해의 뜨거운 눈물이 십자가의 화해처럼 아름답고 기쁜 소식임을 믿는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형제 사이에는 하느님을 닮은 화해가 있다. 화해보다 더 큰 기도와 마음은 없다. 

다시 찾고 다시 살게하는 인격과 인격의 소중하고 진실된 화해가 우리가 갚아야 할 가장 뜨거운 마지막 한 닢이다. 마지막 한 닢의 화해가 서로를 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임을 믿는다. 다시 화해는 형제를 향하고 형제는 다시 화해를 향한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화해의 기도이다. 하느님의 방향은 옳고 그름까지 내려놓는 사랑의 화해이다. 화해가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임을 믿는다. 화해를 지고가는 사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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