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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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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2022년 3월 10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1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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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에스 4장 17(12)절, 17(14)-17(16)절, 17(23)-17(25)절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그 무렵 

17(12)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였다. 

17(14)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17(15)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17(16) 
저는 날 때부터 저의 가문에서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조상들 가운데에서 저희 선조들을 영원한 재산으로 받아들이시고 약속하신 바를 채워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17(23)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17(24)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17(25)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7장 7-12절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구원의 보증으로 저희에게 주신 이 성체가 현재와 미래의 천상 영약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규봉 가브리엘 신부 집전

 

 

2022년 3월 10일 (목)
김규봉 가브리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본론(마태 5,17─7,12 참조), 특별히 후반부(6,19─7,12)에 속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지혜 문학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는데, 대표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짧은 단락들, 강한 어조의 명령, 비유 또는 상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후반부 앞부분(6,19-34)의 중심 주제가 ‘부’였다면, 이어지는 뒷부분(7,1-12)에서는 하느님과 또 이웃과 이루는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7장 7-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예를 들면, 이사 30,19; 58,9; 65,24; 예레 29,12-14; 호세 2,23 참조). 7-11절의 각 절에는 ‘청하다’와 ‘주다’라는 동사가 짝을 이루어 사용됩니다. 이러한 단어의 반복 사용은 중심 주제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청하다’와 ‘주다’라는 동사 외에도 ‘찾다’와 ‘얻다’, ‘두드리다’와 ‘열다’라는 동사가 7-8절에서 짝을 이루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명령 또는 권고에 이어 그에 따른 결과, 곧 인간이 청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지속적으로 요구됩니다(7,7 참조). 또한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7,8 참조).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능력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외로운 이의 기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외로운 이의 기도만이 진실한 기도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말이라면 외로운 이의 기도가 더 진실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이유 없이 마음이 어둡고 한동안 불안이 이어졌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왜 그럴까 정식으로 꺼내어 성찰을 해보았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어둠이 있으면 죄나 잘못이 있을 경우이고, 특별한 죄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뭔가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 욕심이 있을까 성찰해보니 큰 욕심은 아니지만 역시 욕심이 제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이렇게 마음을 어둡고 불안하게 했구나, 욕심이 기도도 안 되게 했구나 하고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개운해지고 기도도 되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은 채 억지로라도 기도를 했다면 아마 욕심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정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욕심은커녕 너무도 곤궁하고 아무도 도울 이 없습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영상을 봤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축 늘어져있는데 파리가 코와 눈가를 기어 다녀도 그것을 쫓을 힘도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식욕이나 식탐이 있어 먹기를 바라겠습니까?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먹을 것을 줄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고 구해줄 누가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이 간절함과 이 외로움이 저절로 기도를 하게 할 뿐 아니라 가장 진실한 기도, 가장 진실한 청원기도를 하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시선을 잡아끄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과 일이 있다면 그만큼 하느님을 진실하고 충실하게 대면하지 않을 것이고 절실하지 않기에 그만큼 절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늙는 만큼 더 진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처량하지만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되고, 냄새나는데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주는 제가 되면 차츰 저를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저를 피하겠지요. 

그때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불만하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언제나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고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외로움의 기도를 저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무엇이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반드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이웃이 바라는 것을 그대로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를 소위 ‘황금률’이라 합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주고,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 그것을 하느님께 청할 때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1년째 축축한 화장실에서 생활하는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냄새나는 가스를 주입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집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피해의식은 얼마 전 옆집 아주머니와 말다툼하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옆집이 집을 싼값에 팔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여기고 할머니는 그나마 냄새가 덜 나는 화장실에서 먹고 자고를 합니다. 그러며 옆집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쉬쉬합니다. 또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제작진의 말에 크게 화를 냅니다. 괜히 와서 자기만 이상한 사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어쩌다가 오히려 냄새가 더 나는 곳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일까요?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을까요? 또 할머니를 다시 거실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나에게 닥치는 일은 내가 이웃에게 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할머니가 이웃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할머니가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 틀리지 않는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어떻게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좋은 것을 받습니다. 이에 제작진은 며칠이고 할머니와 함께 화장실에서 먹고 자며 지내기로 합니다. 

할머니와 며칠을 함께 화장실에서 지냈을 때 할머니는 미안했는지 거실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작진들을 위해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차려놓습니다. 할머니가 거실을 즐길 수 있게 된 데는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이 할머니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항상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웃이 행복한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즉시 나에게 마련된 행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이웃이 행복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구원과 행복뿐만 아니라 모든 것, 곧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물복도 해당합니다. 부자들은 이 원리를 잘 압니다. 이웃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자신도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이 황금률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제정해 놓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부자가 되는 것을 시기하고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늘에서 주기로 마련된 부를 받을 자격을 스스로 잃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기뻐하는 마음수련을 해야합니다. 

이 마음 수련과 반대되는 것이 경쟁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남을 이겨서 더 가지려고 하다가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설사 무언가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행복을 잃습니다. 비교해서 항상 남보다 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가끔은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자신은 고생만 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이웃의 행복을 바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다면 겉모습만 행복한 것이고 불행해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만 그럴 뿐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 고통받게 보이는 시간이 그 사람에게는 이웃에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느님께 받는 시간입니다. 

유기성 목사의 ‘감사가 가장 큰 믿음이다’라는 설교 첫머리에 유 목사가 중국에서 북한 이탈주민을 위해 사역하다 공안에게 붙잡혀 1년 반 동안 옥살이하다 온 다른 목사님과 대화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목사님은 중국에서 북한 이탈주민 200여 명을 한국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하고 도움을 주어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정도 범죄라면 중국에서 한 20년 형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1년 남짓 살고 석방된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동안 바쁘게 살던 나머지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그 1년 반 동안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큰 만남의 시간을 가져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남을 위해 고통받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하느님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이 법칙엔 오류가 없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 상황에서건 분명 행복을 선물해주십니다. 그렇게 당신 황금률의 원리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이해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행복도 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키우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함을 우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국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기가 2천 번을 넘어져도 결국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일어서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믿음은 주시지만, 의지는 주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결국,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의지로만 증명됩니다. 

중국이 서방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기 전, 그러니까 문화혁명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한 중국 스파이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미국 정부 기관에서 일하며 완전한 미국인 행세를 했습니다. 우선 그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서양사람이었고, 중국 인구가 10억이 넘으니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서양식 얼굴을 가지 사람을 고르기가 어렵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고 합니다. 제스쳐도 전형적인 미국 사람의 제스쳐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수상하게 여긴 한 정보요원이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유럽 여행 중에 한 시내버스 곁에 서서 일종의 테스트를 해 보았는데, 미국국가를 휘파람을 불어봤습니다. 반응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여러 나라에서 온 민족이 살고 있기에 미국에 살고 있어도 내가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미국에 사는 것을 느낄 때는 휴일이 되어 TV에 풋볼을 보고 앉아있을 때 미국국가가 나오는데 미국국가를 부를 때야 ‘아, 내가 미국인이지!’ 하고 느낀다고 합니다. 

휘파람으로 미국국가를 불러도 그 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자 그다음에는 중국국가를 휘파람으로 불러보았다고 합니다. 탁 쳐다보더랍니다. 계속 휘파람을 불고 있으니까 발로 장단을 맞추더랍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스파이다’라는 확신을 가진 정보요원은 결국 그를 체포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미국인으로 사고하고 미국인이 사는 삶을 모방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국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완전히 미국인이 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러야 하는 국가는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계명입니다. 이를 위해 이웃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또 행복하지 않은 이웃은 행복하게 해주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노래에 장단을 맞추어야 진정한 하느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의지’, 이것이 황금률을 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유일한 평가의 기준입니다.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랑 만날 땐 사랑이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의지의 문제였어.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냐가 아니라 이 사랑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

내가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 것인지 아는 방법은 내가 지금 끝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 곧 그 의지가 무엇을 향하는지 보면 됩니다. 그러면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습니다. 청하는 것을 받고 싶거든 그 청하려는 것을 의지적으로 이웃에게 기쁘게 내어주려는 노력을 멈추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가식적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말합니다. 그렇다면 솔직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거짓이나 숨김없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말입니다. 당연히 솔직한 사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식적인 사람이 때에 따라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2014년 9월의 어느 날 했던 적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했습니다. 그때 이들 앞에서 피자 파티를 열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가족이 벼슬이냐!”면서 유가족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불순세력’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가식적이라도 위로해주면 안 되었을까요? 이때 아픔을 주는 ‘솔직’이라면, 아픔을 주지 않는 ‘가식’이 더 낫다 싶었습니다. 아픔을 주는 ‘솔직’보다 ‘무관심’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종종 스스로 솔직하다며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솔직할지는 몰라도 “저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랑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또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이라면, 가식이라도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악인과 선인을 가리는 심판이 있겠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누구나 이 나라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늘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대신 돌을 주지 않으며,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결코 나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늘 간곡히 기도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런데 기도에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주님께서 제일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를 주님께서는 황금률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솔직과 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겨라.

- 벤저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마태 7,8)

 

기도로 태어나 기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간절한 기도의 주인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시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받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살리는 기도이며 거짓을 허무는 기도이다. 끝없는 기도의 여정을 우리는 살아간다. 

생명과 기도는 하나의 몸이다. 그래서 기도는 뜨겁다. 기도는 살아있다.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기도 아닌 것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기도로 우리를 사랑으로 데리고 가신다. 

다시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우리에게는 힘겨움을 이겨내게 하는 기도가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를 내어주셨다. 청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는 기도가 다시 우리를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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