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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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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1주간 수요일 -

 

 

2022년 3월 9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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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요나 3장 1-10절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1장 29-32절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이 성사로 저희를 끊임없이 길러 주시니 너그러이 내려 주신 이 성체로 저희가 생기를 찾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3월 9일 (수)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요나의 표징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1장 14-54절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11장 앞부분, 곧 1-13절에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반면에 14-36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에게(11,16 참조) 응답하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발휘하였다며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셨고(11,17-23 참조), 예수님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칭송한 여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11,27-28 참조). 군중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으며,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보고 그 이상의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하고 분명하였습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요나의 표징’은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가 하느님께 구원되어 요나 자신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구원되시어 이 세대에게 표징이 되시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가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한 예언자였듯이, 예수님의 회개 선포도 이 세대의 유일한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듯이, 이 세대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해야만 구원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밖의 것이나 그 이상의 것을 찾는 이들에게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나 예언자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꽃이 아니라 가시를 보는 악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한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생각게 됩니다. 왜 악한 지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고,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보렵니다. 

우리는 악하다고 할 때 보통 악한 행동을 했을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결과로서 악을 저지른 경우입니다. 그래서 실수로 악을 저지른 경우 악하다고 하지는 않지요. 죄인 줄 알면서도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이 왜 죄이고 왜 악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관점을 좀 달리 하여 선을 보지 못하는 악에 대해서 보려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한없이 널려있는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하다는 겁니다. 

꽃이 있는데 왜 가시를 봅니까? 장미꽃의 얘깁니다. 하늘이 있는데 왜 구름을 봅니까? 아니, 하늘은 못 보고 왜 구름만 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내 안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악이 있기 때문이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악만 가득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이 악을 보고, 선이 선을 봅니다. 

그러니 자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 안의 악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밀어 넣은 걸까? 

뱀도 우리 주변에 많지만 욕심이 악을 생산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못 가진 선만 보기 때문에 가진 선을 못 보는 악이 발생하고, 못 가진 것을 가지려는 악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하면, 우리의 욕심이 가난하면, 그래서 ‘더’를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 가진 선들만으로 감지덕지(感之德之)하고 하늘에 더 이상 ‘더’를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장미꽃이 하느님이 만드신 하늘의 표징임을 보지 못하여, 하늘을 보면서도 하늘을 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여 또 다른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표징을 여전히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네가 바뀌라’고, 회개하라고 하실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혜가 있다면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는 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표징이 있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혜가 없어서 당신을 믿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지혜가 있어야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요나’의 표징밖에 남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란 표징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유대 지도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알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사실 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정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먼저 지혜는 ‘선택’과 관련됨을 알아야 합니다. 더 행복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가는 길에서 믿는 게 더 행복한지, 안 믿는 게 더 행복한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을 표징으로 가지겠다는 이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징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믿는 게 좋을까요, 안 믿는 게 좋을까요?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지요.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부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걱정이 해결됩니다. 지금 걱정이 사흘 뒤면 사라질 거라 믿는 거죠.”

할머니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표징을 보고서 믿는 게 아닙니다. 경험으로 체득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게 행복한지, 안 믿는 게 행복한지.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사흘 뒤면 사라질 걱정을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지 못하니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도관으로 29명 사형수의 사형집행 모습을 지켜본 박효신 장로의 간증과 같습니다. 그는 29명 사형수의 사형집행을 지켜보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13명과 믿지 않는 16명의 사형대 앞에서의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두려움 없이 죽음으로 나아갔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다른 종교나 참선한 이들은 여지없이 주저앉고 오줌을 싸고, 그런 것도 하지 않은 이들은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강제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자신만 본 것이 아니라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라 자신이 그렇게 말해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각양각색의 죽음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혹은 자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증거를 대보라고 말해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증거는 믿어보면 알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믿기 잘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자들은 이 두 행복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으므로 안 믿는 것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지 않고 마지막 때도 불행하며 내세에서도 좋은 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혜’는 이 세상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그러면 이 지혜의 눈을 멀게 만드는 장본인은 무엇일까요?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면 눈이 멉니다. 자아가 커지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와가 뱀을 유혹할 때. 모든 유혹에서 항상 그것을 따르면 좋은 점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더 큰 좋지 않은 점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눈뜬 소경이 됩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분명 전쟁을 해서 얻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돌파구를 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잃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고 끝내고 싶어도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도 없습니다.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고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그 양심의 가책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할까요? 참 멍청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자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믿음으로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눈을 가리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제는 지혜의 눈을 넓힐 방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지식’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지식과 같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이미 충분히 체득한 지식을 잘 활용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식이 있어야 지혜가 작동합니다. 

스웨덴 영화 ‘오베라는 남자’(2005)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43년 다닌 직장에서도 해고된 오베라는 남자가 살 의욕을 잃고 자살만 생각하는 순간 따듯한 이웃들을 만나며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잃고 아버지도 사고로 돌아가시는 비극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고 또 그 아내가 교통사고 다리를 잃고 유산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기하여 훌륭한 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베는 너무 무뚝뚝하고 사람을 싫어해서 이웃이 없었지만, 결국 매일 죽으려고 하는 터에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게 사는 맛이구나!”

오베는 자신의 장례식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초청하라는 편지와 함께 평안히 눈을 감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할 때는 혼자였으나 죽으려고 할 때는 수많은 이웃이 생겼습니다.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이 없게 이웃이 몰려왔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입니다. 그는 편안하게 저승에서 아내를 만납니다. 

이것이 부활을 꿈꾸는 사람의 삶입니다. 무엇이 행복한지는 죽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를 번갈아 보며 결정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참으로 사는 맛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오베라는 남자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직장을 잃었어도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행복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면 지금 죽는 것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 중에 무엇이 행복한지 비교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비교하여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 후 한국이 겪게 될 모습은?”에 초등학생이 답한 것입니다. 


좋은 점: 

1. 이산가족의 슬픔 없어짐

2. 인구 늘어남

3. 자원과 기술이 결합해 경제력이 높아짐

4. 유라시아 철도가 건설되어 관광 대국이 됨

5. 일자리가 늘어남

6. 북방-남방 한계선이 없어짐

7. 전쟁 위험 없어짐

8. 군사력 증가

9. 북쪽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음

10. 북쪽의 문화재(역사) 체험 가능



나쁜 점: 

1. 경제 혼란

2. 세금 늘어남

3. 지뢰 제거가 어려움

4. 언어 잘 통하지 않음

5. 보이지 않는 차별 존재

6. 돈이 많이 필요함

7. 사회적 혼란
(대통령 선거, 민주주의-공산주의, 정치)



부모에게 떼쓰는 아이를 봅시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올 나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생각해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모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 그 선택에 대해 좋은 좀과 나쁜 점을 A4 반반으로 나누어서 써오라고 시키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무조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지혜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연습을 많이 해야합니다. 그래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떼쓰는 자아의 편을 들어주지 말고 잠시 종이를 꺼내 장단점을 써보는 노력을 하면 좋습니다. 지혜는 더 행복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지혜롭게 자란 아이는 반드시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젊은 남녀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오랫동안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친구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그때마다 “그럼,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질문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남자친구의 대답이 점점 무성의한 답변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나, 얼굴도 보지 않고 “아직도 모르겠어?”라고 답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질문 좀 던지지 마라.”고도 합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상태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사랑의 증명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단 한 번의 행동으로도 증명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싹트는 믿음을 통해서만 말하지 않고 또 행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표징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과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의 10가지 재앙, 광야에서의 만나, 그리고 예언자들로부터 받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면서 하느님의 보호를 직접 보여 주셨고,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금의 믿음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볼 수 있지만,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 자체가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점령한 적국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보호를 전했고, 그들이 구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믿음만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겨라.

- 벤저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1,32)

 

모든 일은 회개에서 비롯된다.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참된 표징을 얻게된다.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건강한 삶의 새로운 모습이다. 우리들 사는 모습이 표징이 되어야 한다. 회개라는 표징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다. 

회개와 참다운 생활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진실한 신앙인의 삶이 바로 참된 표징이다. 회개를 실천하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는다.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참된 표징은 회개로 거듭나는 우리들 삶의 기쁜 탄생이다. 교만과 이기심을 벗어나야 우리의 신앙도 표징이 된다. 

표징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회개의 길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회개는 새로운 삶의 문(門)을 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표징임을 믿는다. 회개하여 할 우리자신이다. 진리를 찾는 이는 회개로 새로워진다. 새로운 생활 새로운 마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맑은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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